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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청년 Oct 24. 2021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사랑하는 나의 반쪽, 아니 이제는 전부가 된 여자친구와 주말을 보냈다.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버팀목이 아닌 두 다리가 되어준 나의 연인이다. 이렇게 불안하고 지쳐있을 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자 행운이다. 언젠가 닥칠 이별이 벌써 두려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다. 그날은 올 것이고 거스를 수 없다. 허나 억지로 생각하며 우리의 젊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지금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하면서 주어진 나날들을 남김없이 사랑하자.


오랜만에 손으로 쓰는 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을 또렷이 마주하는 시간. 가끔은 글을 씀으로써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자위용 수필을 쓴다. 글쓰기 자체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임을 여러 작가들로부터 눈치챘었다. 그래서 나는 이 펜을 들어 감정을 해소하거나 달래려 하지 않고, 조금 더 증폭하여 느끼고 더 부끄러워하고 더 불안해지려고 한다. 위로와 다짐은 허황이고 그것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실천으로 옮겨지는 글을 쓰고 싶은데, 지금껏 실천의 글을 써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것 같아서 갑자기 서글픔에 잠겨버릴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임을 숙명적으로 느낀다.


11월 15일, 생애 첫 면접을 보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결과를 통보받았다. 불합격. 김칫국을 마시지 않으려 했다. 자꾸만 입안에 고이는 국물을 뱉어내고 게워냈으나 혀 끝에 남겨진 그 맛은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텅 빈 위장이 허전하고 공허하다. 그토록 원하던 기업은 아니었고 친구들도 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삼성전자라는 기업의 천문학적인 가치가 달콤했던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에 입사함으로써, 삼성전자 사원증을 목에 걸면서 아무 쓸모도 부여되지 않은 내 신분을 한 순간에 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만 같아 너무 아쉽다. 아무 희망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어떻게 뚫은 서류전형과 GSAT인데 바로 앞 줄에서 매진이 되어버려서, 맨 뒷 줄로 돌아가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실의에 빠져 있는 내게 혜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나이라면 당장에 취업을 하지 않겠어. 취업 준비를 몇 년씩 한 상태도 아니잖아.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여행을 다닐 것 같아."


나는 왜 취업을 하려는 것일까. 부모님이 직장생활을 오래 하셔서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회사생활을 다니면서 그렇게 큰 돈을 벌 수는 없다. 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살 순 있다. 취업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안정감이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저 보통 사람이 되고 싶은 것뿐이다. 사회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고 궁핍하게 살기 싫다. 음악이나 미술을 해서 먹고살겠다는 간절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등바등 거리며 살 필요는 없다. 안정감이 필요하다. 겨울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옷을 싸매고 자도 궁핍은 내 코 끝을 시리게 만들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망설이게 되고, 건강에 안 좋은 줄 알면서 오래된 냉동 돈가스나 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고, 실수로 막차를 놓치면 첫 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옷 가게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옷을 입어보는 것도 망설이게 된다. 나보다 더 궁핍한 환경에 처한 사람도 많겠지만 그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위로가 되진 않는다. 나는 감정의 영역이 넓고 깊어서 작은 자극에도 한없이 우울해지고 쓸쓸해진다. 그런 순간들을 '나는 아직 청춘이잖아!' 하면서 쿨하게 넘기기 힘들고 자존심이 상한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있긴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빛을 잃어가는 별똥별, 온기를 잃어가는 불씨와 같다.


나는 나름 잘 살아오지 않았나. 개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모습에 만족스럽고 이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가진 색깔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울렸을 때 더 다채로워질 수 있는 법이고, 이 고유의 색은 소중한 것이다. 나의 성향, 특징,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실험, 성장 욕구, 특정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 주변 현상들을 나의 물감으로 채색할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투명하지 않다. 나에겐 색깔이 있고 그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며, 그 외의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취업준비를 하면서 색을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색이 바뀌는 게 아니다. 어두워지거나 밝아지는 것도 아니고 투명해진다. 내 속엔 타인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담아내야 하고 어디에 두어도 주변에 흡수될 수 있는 투명한 유리 조각이 돼버린 것 같다. 이것을 일종의 보호색으로 생각했다. 카멜레온처럼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색깔을 잠시 숨기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손에 꽉 쥐고 있는 그것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처박아 두고 걸음을 떼어야 하는데 무거워진 바지는 자꾸만 흘러 내려간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버린다고. 지금 내가 그렇다. 나의 길을 가면서 이상을 추구하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길을 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좌절하는 것이다. 정말 '이도저도' 안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헤세의 데미안,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읽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 취준진담에 써 놓은 얘기들이 다 이렇게 비겁한 변명뿐이잖아. 글을 쓰면 쓸수록 부끄러울 뿐이다.


  용기란 두려움을 극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과 같이 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를 다시 마주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 불안이라는 것은 단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많다. 그것들이 내 중심에 있는데 무엇이 무섭고 두려운가. 그 외에 바라는 게 있다면 노력해서 쟁취하자.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자. 분명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글이라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나중엔 아주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불평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간직하자. 이 지나친 피로, 이 지나친 시련에도 성내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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