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하반기 시즌은 SBS 교양PD, CJ E&M 교양PD, SK하이닉스 영업마케팅, LG디스플레이 세일즈마케팅, 삼성전자 설비엔지니어, 현대오일뱅크 엔지니어, 현대자동차 상품기획, 대한항공 항공정비 기술직 이렇게 지원했다. PD 준비만 하기엔 너무 불안했다. 주변 친구들은 서류 전형 합격 발표 전부터 인적성 공부와 면접 스터디를 하는데, 언론고시 준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학교 선배들이 많이 합격한 회사, 전공이 비슷한 친구들이 많이 지원하는 곳, 굵직한 대기업에 지원서를 냈다. 방송국에도 무선 통신 및 IT 관련 기술자들이 필요하지만, 상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대기업만큼은 아니다. 제조회사들은 기본적으로 개발을 담당하는 R&D 연구소, 생산을 담당하는 공장이 있어서 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다. 대신 전공과는 무관한 직무에 지원했다. 생산 현장에서 정해진 일만 하는 것보다 기획 부문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케팅이나 상품기획 쪽은 전공이나 직무 지식이 전무하지만 그래도 제조회사니까 공대생을 뽑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직무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고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런 업무겠지 하며 상상대로 쓴 것 같다. 그래서 뭐, 거의 다 떨어졌다.
대한항공은 많이 아쉽다. 항공사 취업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중학교 동창인 우중이가 승무원을 준비하면서 나도 항공사에 관심이 생겼는데, 우중이는 영어학과 출신이지만 영어를 엄-청 잘하진 못했다. 취업 초반에 실패의 고배를 많이 마시다가 어느 순간부터 승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승무원이 되고 싶냐고 물으니, 자기는 사회생활에 자신이 없어서라고 했다. 캐빈 크루는 매번 인원이 바뀌어 비행을 하게 되고, 직원들끼리 트러블이 생길 일도 없다고 한다. 외부 고객이야 한 번 보면 말 사람들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한 번만 참으면 되고. 그리고 하나 더, 해외 각국을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각지에 기념품이나 특산물을 모아서 아주 나중에 소품을 진열한 커피숍도 차리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한 3년을 준비해서 승무원이 되었다. 나는 우중이처럼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이다. 우중이도 3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겠지만.
승무원이 되면 해외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매번 여행하는 것 같지 않을까. 우중이 말로는 나중엔 호텔에만 있다가 온다고 하는데, 나라면 앞에 있는 노점에 가서 현지 음식이라도 한 끼 사 먹고 올 것 같다. 그 감상을 글이나 사진, 영상으로 담아내고 말이야. 고객 응대와 시차 적응에 고생이 많지만 또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는 직업인 만큼 자부심 있고 근사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해온 게 있어서 당장 승무원을 준비할 순 없다.
그래서 항공정비 기술직에 지원했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직무였다. 내가 엔지니어의 길을 걷는다면 공항의 격납고에서 거대한 비행기를 관리하는 그런 근사한 일을 하고 싶었다. 직무에 필요한 지식도 내게 익숙한 개념이었고 조금만 공부해도 이해할 수 있다. 자기소개서에 꼭 들어가는 항목 중에 하나가 직무에 지원한 동기를 묻는데, 뭐 별다른 이유 없다. 이 일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공채가 1년에 한 번 밖에 없고, 이번 기회는 끝났다. 정목이형은 서류전형에 합격해 면접 준비를 하고 있다. 형은 항공산업기사 공부를 하고 있고 면접에서 탈락해도 자격증을 취득하여 계속 도전할 거라고 했다. 나도 이번 시즌이 끝나면 항공산업기사 자격증을 준비해볼까. 하지만 1년 후다 1년 후. 그동안 다른 것들에 한 눈 팔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또 떨어지면.
낭만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주어진 것에 집중하자. 태어나서 처음 써본 자기소개서로 SBS 서류전형에 통과했고 홍대에서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결론적으로 망한 것 같지만, 생애 첫 자소서로 방송사 서류전형을 뚫었다는 건 의미가 있다. 시험은 1교시 - 상황판단검사 / 2교시 - 시사 상식 / 3교시 - 작문 순으로 진행되었다. SJT는 대기업 인적성 검사와 똑같아서 딱히 준비할 게 없었고, 시사 상식은 많이 약하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공부를 한다고 해도 범위가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언론고시 온라인 카페인 '아랑'에서 꽤 오래 준비하신 분들끼리 스터디를 모집하고, 출제 가능성이 높은 시사상식 자료를 공유하는데 나는 준회원이라 눈팅만 가능하다. 스터디도 서류나 필기 합격 경험이 있는 사람끼리 비슷한 급의 스터디원을 모집하고 있어서, 경험이 전무한 나는 염치없이 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가장 최근 호 시사상식 책을 사서 주구장창 보는 것, 그리고 네이버 상식백과에서 업로드 순으로 개념을 정렬하여 프린트해서 보았다. 시사상식 첫 번째 문제는 이랬다. '박근혜 탄핵 사건번호를 적으시오.'
작문은,
1)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2)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하나 밀어 올리느라
3)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4) 겨울나무만이 타락을 모른다
5)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에서 두 문장을 고른 뒤 처음과 마지막 문장으로 구성하여 80분 동안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5번으로 시작하여 2번으로 끝나는 글을 썼다. 20분 동안은 글의 주제를 정하고 짜임새를 구성하는데 할애했다. 서술지 뒷 면에 낙서를 하거나 마인드 맵을 그려도 상관없다. 연필로 쓰고 지우면 되니까. 그리고 나머지 60분 동안은 글을 썼다. 아, 그런데 전략 실패다. 20분 동안 내용 구성을 탄탄히 하지 못해서, 60분 동안 글을 쓸 때 문장을 계속 수정했다. 작문 시험은 펜만 사용할 수 있어서 수정을 하려면 수정테이프를 사용해야 하는데, 서술지 자체가 갱지라서 수정테이프를 자주 사용하면 일단 가독성이 떨어진다. 구성하는 시간을 좀 더 늘리고, 연필을 가져가서 썼다 지우면서 쓸 걸 그랬다. 아이디어가 좋고 기획이 잘 되어 있으면, 문장을 지을 때도 확신이 생기고 끊김 없이 쓸 수 있다. 작문 전략을 다시 짠다면 이렇게 하겠다. 40분 - 내용 기획, 40분 - 연필로 서술 및 최종 수정, 10분 - 펜으로 덮어쓰고 지우개로 연필 자국 지우기.
불안한 마음이 상쇄될 수 있는 건, 삼성전자 GSAT를 통과했다. 같이 공부한 선규도 붙었다. 선규는 소위 양치기로 공부를 했다. 나는 GSAT를 보기 전까지 딱 두 권 밖에 못 풀었는데 선규는 시중에 나와있는 GSAT 책은 거의 다 풀고 봉투 모의고사도 3회 분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할 때 불안했다. 주변 친구들에 비해 충분히 문제를 풀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 회를 거듭해서 풀 때마다 실력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지 않고 틀린 유형은 계속 틀리고, 맞는 문제는 계속 맞는 식이었다. 제한 시간 내에 풀지도 못했다. 언어논리 30문제, 수리논리 20문제, 추리 30문제, 시각적사고 30문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리논리와 추리 문제는 매번 절반밖에 못 풀었다. 주변 친구들은 문제를 다 풀었다거나, 모의고사 성적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만족할 수준의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다.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모의고사를 치르고 나면 진이 빠지고 무언가에 몰입했다는 성취감도 조금 있는데, 채점을 하고 나면 뭘 한 건가 싶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회의감이 들고 괜히 다른 친구들의 성적이 궁금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문제를 다 푸는 것보다 정답률을 높이는 게 더 중요했다. 몰라서 못 푸는 문제도 있지만, 아는데 틀리는 문제도 항상 있다. 몰라서 못 푸는 문제 유형은 어차피 다음에 나와도 또 모른다. 그걸 붙잡고 인강을 보면서 풀이법을 배울 시간에, 풀 수 있는데 실수로 틀리는 문제들을 줄여 나가는 게 성적 향상에 더 효율적이다. GSAT는 고난도 문제에 배점이 더 높지 않고 모든 문제의 취득 점수가 똑같다. 나는 오답노트를 만들어서 못 푸는 문제들의 유형과 실수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매 회 분석했고, 다음 차 시험을 볼 때 그것만 생각하고 풀었다.
내 전략이 잘 통한 것인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결과적으로 붙었다. 수리논리 8문제, 추리 6문제를 못 풀었는데도 말이다. 확실히 정답률이 중요한 것 같긴 하다. 모르겠으면 안 푸는 게 낫다.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이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면접 준비를 해야 한다. GSAT 합격 소식을 들음과 동시에 아주 만약에 진짜 붙으면, 만족하면서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간사하게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또 뭐냐, 그러면 애초에 쓰질 말았어야지. 솔직히 T.O가 많아서 썼다. 여기까지 온 것도 채용 인원이 많아서 남은 거지, 다른 직군에 썼으면 진작에 떨어졌을 것이다.
삼성전자는 채용 직군이 다양한데 그중에 F직군은 설비엔지니어를 말한다. 설비엔지니어는 말 그대로 반도체 생산공장(FAB)에 들어가서 각 공정의 설비를 담당하는 프론트라이너다. 항상 방진복을 입고 FAB에 들어가서 제품과 설비를 점검해야 하고, 생산라인이 야간에도 돌기 때문에 3교대로 일을 해야 한다. 그만큼 보수도 높긴 하지만, 과연 이 직군이 나와 잘 맞을지 의문이다.
하루 루틴이 고정되어 있고 그것을 지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나, 수면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여 수면의 질을 높이고 그로써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고 싶은 나인데 불규칙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는 교대 근무와, 방진복으로 내 진짜 모습을 모두 가린 채 장비 앞에서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을 평생하며 살 수 있는가. 사실 반도체가 아직도 뭔지 모르겠다. 삼성전자라는 거대 기업의 캐시카우가 되는 비즈니스라서 관심은 있지만 제품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 자동차나 기계, 포클레인 같은 건 어렸을 때 많이 가지고 놀긴 했는데. 그런데 나 지금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거냐. 합격한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포기할 것도 아니잖아. 허황된 생각이다. 배가 불러서 내 신분을 잊어버렸구나.
최종면접을 준비해야 한다. 면접은 전공 면접, 창의성 면접, 인성 면접을 하루에 몰아서 본다. 1차 실무 면접, 2차 임원 면접 이런 것 없이 하루에 끝나기 때문에 최종 면접과 다름없다. 어쨌든 하루 만에 끝나기 때문에 부담은 덜하다. 듣기론 인성면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전공이나 창의성에서 감점이 있다 하더라도 임원급이 보는 임원 면접에서 모두 만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