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 람 Sep 22. 2018

내 안에 두 가지 본성 2

양심의 활동


내 안에 두 가지 본성이란 주제를 너무 섣불리 건드리고 말았다. 이 주제는 심리학자나 정신 과학자,  수도자나 종교인들 또는 철학자 등 전문적인 분들이 깊고도 섬세하게 다양한 형태의 글로 잘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하는 평범한 소시민이 일상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관점에서 너무 겁 없이 거칠게 뱉어놓고 말았다.  역시 부끄러움은 표현한 자의 몫이다.


비즈니스의 현장에서는 생존이 이익과 직결되어있다고 믿고 있다. 거래라는 것이 내 이익과 상대와의 이익을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이지만 기본적으로 내이익을 우선시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합의와 동의는 거래하는 당사자들의 힘과 기술에 의해 이익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익의 극대화를 성공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 가운데 갑질이니 하는 것은 갑과 을이 갖는 힘의 차이가 현격히 클 때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공정과 정의는 있지만 그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곧 정의가 되는 경우가 시장의 논리이다.

갑질을 당한 이는 갑질로부터 잘 학습이 돼서 또 다른 갑질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있다.

이 순간이 그 환경에서 내가 같은 갑질을 재생산할 것인가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여백, 쉼, 멈춤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힘 말이다.

양심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한 것이다.


절대 갑과 을의 경우, 을의 선택은 갑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엔 거래의 포기밖에 없다. 그나마 포기가 생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나 그 포기가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자존감은 바닥에 팽개쳐지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의미를 찾고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아 성공한 분들도 있지만 일반의 경우 쉽지 않다.


하지만 과연 절대 갑이라는 게 존재할까? 대부분의 삶의 여정에서 때론 갑이 되기도 을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내가 갑이 되었을 때 그 위치까지 되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렀는가가 보통 그 순간 그 태도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기업문화나 살아온 과정이 많은 얘기를 대신한다.


법에 기대도 싶지만 이익의 조정에 있어서는 법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 법은 정말 최소한의 방어벽 정도랄까? 그나마 힘 있는 자가 법을 더욱 잘 활용하고 대부분은 당사자의 합의를 유도하는 정도이다.

  

워낙 우리 삶의 활동에 금전의 영향이 크다 보니 인간관계도 이익을 고려하는 비즈니스적 거래관계의 습성을 부지불식간에 적용한다.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유익함을 돈으로 계산하려 한다든지 관계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구하려 한다든지 관계 내에서 금전적 이익을 배분할 일이 생길 때 비즈니스 논리를 적용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와 관계 자체를 추구하는 관계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활동하는 양심은 뭘까?

상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익의 대상인가? 관계의 대상인가?

상대방을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까?

내이익을 어디까지 확장해야 할까?

내가 이익을 취함으로써 상대가 치러야 할 대가가 어디까지일까?

그 배려를 하고도 나는 생존할 수 있을까?

내가 획득 가능한 이익을 포기하고 배려한 만큼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서로 입장 바꾸어 보며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작은 신념에 대한 값을 매겨보기도 한다.


바로 이 시점이 잠시 멈추어 양심의 활동을 기대하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안에 두 가지 본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