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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 람 Sep 20. 2018

내 안에 두 가지 본성

생존과 양심

신은 양심이란 이름으로 모든 인간 안에 살아있다.

인류 보편적 본성이 양심이다.

한국인의 양심이 따로 있고, 일본인의 양심, 중국인의 양심, 미국인의 양심, 세네갈인의 양심, 아랍인의 양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인류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본성, 여타 동물들과 구분되는 특성이 양심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 보편적 본성인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해 세대를 거쳐 발달시켜온 자기중심적 본성도 있다.

생존을 위한 본성은 워낙 잘 발달되어 거대하게 성장해 있어 양심은 신의 위치에 따로 두어 부활시켜야 할 정도의 타자로 분리되고 작게만 느껴진다.

그저 멈춰서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양심이라고 하는데,

거대하게 성장한 자기중심적 생존 본성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양심의 본성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매 순간 새로운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어김없이 눈앞에 보이는 이익의 마력에 자기중심적인 생존 본성의 손을 들어준다.

양심이란 것이 어디 밖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모든 지적, 감정적, 신체적 기능이 그러하듯 사용하고 발달시키지 않으면 아주 어린아이처럼 힘이 없다.

법과 도덕, 사상은 양심과 생존 본성과의 사이에서 적절한 수준의 타협점을 제시하고 최소한의 경계선을 지키자는 가인드라인을 세운다. 때론 법의 논리, 도덕의 논리, 사상과 이론의 논리, 더 나아가 종교의 교리에 내양심을 맡겨두고 이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잘 타면서 살아가는 것이 소위 세상살이 잘한다고 여긴다. 물론 때로 이 선을 넘어서기도 하면서 말이다.

종교는 좀 더 깊이 있는 내면의 기준으로 양심의 울림을 알아차리도록 온갖 비유와 은유의 말씀 또는 설법으로 건드려주는데, 본질보다는 권위를 더하려 한 신비함과 권위 자체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종종 달을 가리키는 현란한 손가락만 쳐다보고 넋을 놓기도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신비적 힘과 권위에 기대어 양심의 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구실을 찾고 자기중심적인 영적 우월감을  강화시킬 도구로 삼은 적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에 속고 속이고 속아주는 참으로 아슬아슬 외줄 타기 인생이다.


생존 본성에 충실하면서 잘살면 되지 무엇이 문제인가? 적당한 범위의 경계선 안에 양심을 두고 소위 자아실현이란 이름으로 자기중심적 자기 욕구를 채워나가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충분히 규범을 지키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며, 나름 성숙하고 균형 잡힌 문화시민으로서 이 시대를 잘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생존 본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내 안에 소외된 양심의 본성이 울고 있다. 인간은 두 가지 본성이 분리되어선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두 가지 본성이 통합되고 화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쉴 수 없는 존재이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내 안에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겐 평화가 없었다고 한다. 내 안에 하느님은 뭘까? 인간의 삶의 방식이 온통 신을 향해 살아온 종교의 시대, 중세를 살면서 내 안에 하느님과 시대의 하느님은 다르단 말인가?


내 안에 양심의 존재조차 못 느끼고 그 섬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외적으로 생존 본성을  잘 발달시킨 나는 늘 자기 욕구에만 충실한 종으로 헛헛한 외로움을 정당화시키며 끊임없이 너와 나를 구분하는 분리와 분열을 만들어내는 차가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분리와 분열의 대상이 되는 내 안에 양심과 내 밖의 사람들은 여린 상처에 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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