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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고창 라이딩

자전거순례길

by 바 람

변덕스러운 봄날씨에 수많은 이재민을 낳았던 경남산불이 잦아들 즈음 친구와 함께 고창으로 떠났다. 5-6월 해외로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 자전거여행을 가고 싶어 그에게 함께 갈 코스를 청했다. 친구는 자전거를 타면서 섬세하게 변하는 자신의 몸과 대화를 즐기는 자전거 고수이다. 늘 새로운 페달링 연구를 즐기는 그를 나는 자전거 명상가라고 부른다. 올 4월에만도 고창으로 떠나기 전 2주간 500킬로를 달렸단다. 그가 황금 헬맷을 쓰고 로드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매끄러운 금빛 잉어를 연상케 한다. 이번 여행은 로드가 아닌 MTB로 함께 한다.


고창읍성에서 출발한 첫 행선지는 고인돌유적지였다. 도시입구 ‘유네스코도시 고창’ 홍보문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엇이 이곳을 유네스코도시로 만들었을까? 너무 사전지식 없이 방문한 것이 한편 당황스러웠지만 반면에 이 땅에 대한 기대감을 슬그머니 불어넣었다. 봄바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거친 바람을 헤치며 들판 끝자락에 도착한 곳은 나무울타리로 가려진 한적한 고인돌 유적지이다. 울타리 너머엔 거대한 바위들이 시간을 잊은 채 후손들을 기다리며 평화로이 누워있다.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곳곳에 수많은 돌무더기들이 수천 년 동안 땅이 내어주는 넉넉한 산물들로. 많은 이들의 배를 따뜻이 채워주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유채꽃 만발한 들녘, 좋은 계절 때맞춰 찾아간 고장, 고창이다. 누군가에게는 무척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내겐 마치 일본 어딘가 작은 섬을 가고 있는 듯 낯설고 이국적인 경치이다.

작은 강가위 한가로이 날고 있는 왜가리가 펼치는 전경은 우리의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저 멀리 묵묵히 우뚝 서있는 병바위는 수천 년 동안 울고 웃었던 우리 삶을 함께 지켜주지 않았을까?


남도의 음식은 소박하고 넉넉하다. 블로그 정보를 보고 찾아간 선운사 앞 다정식당은 다행히 평일에 문을 열었다. 보통은 나물 캐러 가시던지 외부일로 평일엔 문을 닫을 때가 많은데 오늘은 생선 손질한다고 잠시 문을 열었다고 하신다. 봄향 그득한 야생의 산나물을 적절한 손맛으로 무친 이 땅의 봄맛에 연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3000그루 동백나무숲에 싸여있는 선운사, 입구에 있는 백파선사의 비문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당대 지성인들의 발자취를 잠시 엿보는 즐거움이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비문 뒷면 펼쳐진 글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불균형적인 여백 속에도 일정한 리듬을 갖고 쓰여 있는 대가의 붓놀림을 보면서 묘하게 빠져드는 매력을 느껴본다.


고창은 지성인을 키우는 힘이 있나 보다. 미당 서정주시인도 이곳에서 나고 묻혔다. 폐교를 개조한 그의 시문학관은 잠시라도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팔순에 자필로 쓴 시인의 시 ‘한송이의 국화꽃’ 은 묘하게도 선운사 비문에 새겨진 추사의 글을 연상시킨다. 부드러운 선이 여성스러우면서 동시에 기개가 느껴지는 남성적 힘이 서려있다.

인촌 김성수의 집안의 종살이를 하셨던 아버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가난과 열등감등이 고창의 바람과 함께 시인을 키웠을 듯하다.

자전거로 고창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다 보니 그의 시가 몸으로 느껴진다. 땅과 바람과 하늘, 그리고 시인.

그의 시와 더불어 나 또한 지나온 세월의 상처들도 바람과 함께 흘러가는 듯하다.

동호해변, 명사십리를 지나 우연히 마주한 천주교 순교성지. 사순 성주간을 지내며 부활절을 앞둔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복자 최마티아 순교자 성지를 마주하니 불현듯 알지 못할 감동이 솟구친다. 바람의 손길이 감싸주는 듯하다.

아, 이 길은 순례길이었구나!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동학도 서학도 모두들 잘 사는 세상을 꿈꾼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싶다. 자신과 화해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곳곳에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깃발과 현수막이 바람에 날린다. 이방인의 눈에는 지금이나 200여 년 전이나 이 땅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봉준생가가 있는 곳, 부드러운듯하면서도 강인한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사람들도 땅의 모습과 닮았으리라. 청보리밭, 무장읍성을 거쳐 고창읍성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이 땅을 닮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이제 우리도 출발지인 서울로 갈길이 남아있다. 아니 살아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순례길은 끝나지 않으리라.


2025고창라이딩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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