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und Zero
하필이면 비 오는 날, 911 추모박물관에 가자고 한다. 아내는 가봤더니 한 번쯤은 꼭 볼만하다고 나를 슬쩍 밀어 넣는다. 나도 안다. 가볼 만한 곳이라는 것을… 몇 차례 Ground Zero 분수대까지는 갔었지만 차마 그 밑으로 내려가 테러의 현장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게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공항 검색하듯 몸수색과 가방검사가 진행되면서 긴장감이 높아진다. 전 세계 항공기탑승 시 강화된 보안검색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입구를 지나 아래로 길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옆으로 월드타워의 비틀어진 골격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그때의 사고현장으로 들어간다.
허물어진 건물을 표현했다는 기형적인 동선을 따라 내려가는 공간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불현듯 현재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뉴스장면이 오버랩된다. 참혹한 폭력의 참상을 더욱 생생히 몰입하게 되는 이유이다.
시간을 뛰어넘는 우주의 한 공간처럼 어두운 조명아래 과감하게 설계된 높은 천장의 넓은 메인홀에서 이어지는 특별전시관은 촬영금지 푯말을 지나 또 다른 유리문 너머로 전개된다. 무거운 침묵 속에 울리는 잡음 섞인 무선통신음, TV 앵커의 긴박한 보도음 가운데 사고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의 소지품들과 유물들이 사방에 밀도 있게 전시되어 있다. 조심스레 하나둘 보면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그날의 현장에 와있는 듯하다. 스크린을 통한 반복적인 영상 또한 자연스레 911 테러사건의 전말을 알려준다. 이 전시관에서는 당시 충격적인 고통의 현장을 생생하게 남겨 테러에 굴하지 않고 그 피해를 일으킨 테러의 주체가 누군지 밝히고 그 적을 끝까지 추적하여 반듯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결연한 미국인들의 의지가 확고히 느껴진다. 이렇듯 테러참사에 대한 미국의 정신을 창의적으로 구현한 천재적인 건축가들과 전시가들의 합작품은 시민과 함께하는 미국문화의 힘이 아닌가 싶다.
2001년 9월 11일, 벌써 그 일이 일어난 지 24년이 흘렀다. 제삼자인 나도 20년쯤 지나서야 한발 떨어져 감정을 삭이고 대할 여지가 생기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충격과 고통이 클까! 아직도 그날의 아픔이 생생하리라. 어떠한 말로도 채워질 수 없는 그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희생이 단지 미국인뿐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헛되지 않기를 조심스레 기원해 본다.
테러의 배후인 소련-이라크전, 이란-이라크전을 거치며 성장한 알카에다 조직과 미국과 미국인 모두가 테러의 대상이라는 빈라덴의 무표정한 육성인터뷰를 들을 때는 증오에 갇힌 인간의 단면을 쓸쓸하게 엿본다.
오랜 역사 속에 세뇌된 극단적으로 왜곡된 종교관, 생존의 위기 앞에 드러나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 뿌리 깊은 무시와 무관심, 조직적인 선동, 존중받지 못한 분노의 뜨거운 불길이 섬뜩하다. 과연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들의 모습을 통해 혹시라도 있을 내 안의 잠재된 폭력성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 전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겠구나.
‘우리는 여기에 들어올 때는 개별적으로 왔지만, 나갈 때는 함께할 것이다.’
We will walk out together…
궁극의 우리라는 좀 더 넓은 인류애를 향하여
멀지만 도달해야 할 증오와 폭력을 잠재울 용서와 포용 그리고 화합의 길을 기원한다.
오가는 버스 안에서 낯선 동양인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청년의 작은 친절에서 그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