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 천재-파리 오스만시장
뉴욕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여행계획에서 의도치 않게 시계추마냥 서울로 다시 돌아와 파리로 가는 일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열흘간격으로 14시간 비행이니 이만하면 시차적응이란 개념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신체리듬에 맞춰 지내는 수밖에 없다.
파리의 아침은 갓 구워낸 바게트, 크로와상으로 출발하는 게 국룰이다. 살짝 비 오는 터라 숙소 근처 빵집 실내테이블에서 파리일상을 시작해 본다.
파리는 놀랍게 걷기 좋은 거리로 변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최근 20년 사이에 과감히 자동차도로를 줄이고 그 자리를 보도와 자전거에게 양보한 도시정책에 있었다. 막상 직접 도시를 방문해 보니 궁금한 것이 더 많아져 현장에서 정보를 찾아보면서 도시역사를 공부하게 된다. 덕분에 파리의 Gorge Eugenne Haussmann 오스만시장을 알게 되었다. 1800년대 나폴레옹 3세 시대에 파리시장으로 임명된 오스만시장은 쓰레기와 오물 가득한 도시를 그의 재임 18년 동안 전혀 다른 근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개선문을 중심으로 널찍하게 정비한 도로는 도시구성의 뼈대가 되었다. 또한 곳곳의 공원배치는 물론, 심각했던 공중위생 개선을 위해 상하수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파리의 상징적인 검푸른 지붕의 7층 건물을 그의 임기중 40,000채나 지어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도시개발 사례를 만들었다. 현재 파리의 60% 건축물이 그 시기에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그 기초 위에 도시를 개발해나가고 있으니 그의 탁월한 안목과 행정력에 놀랄 뿐이다.
1층은 상점, 2층부터는 주거시설로 발코니가 있고 적당한 높이의 뷰가 좋은 3층은 로열층, 그위로 갈수록 가격이 싸지고 맨 꼭대기 지붕층은 하녀들의 방으로 알려진 다락방이 있다. 건물들이 서로 벽면을 맞대고 있는 7층 형태의 건물은 그리스 로만양식을 나름 프랑스식으로 재해석한 당시 프랑스건축가들의 역작이다. 시장의 이름을 따서 오스만양식이라고도 한다.
20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긴 도시역사의 관점에선 눈 깜빡할만한 시간이 아닐까? 시대가 전제군주와 대통령제, 시민혁명등 복잡한 근대사의 혼란기라고는 하나 어느 시대인들 쉬운 조건이 있으랴? 탁월한 역량의 행정가에 의해 도시의 여러 집단과 계층의 이익관계가 조율되고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된 것은 부럽기도 한 반면 짧은 시간 이룩한 성과는 또 다른 희망을 던져주기도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로도 내부적으로는 폭동이 끊이지 않고 근대 산업혁명에서는 영국에 뒤쳐지며 군사적으로는 독일, 러시아와 마찰이 심해지는 등 로마제국 이후 서유럽 프랑크제국의 자존심이 흔들리는 혼돈의 시대가 나폴레옹을 불렀다. 계몽주의사상은 천재들을 낳는 토양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오스만시장에 의해 근대도시로 변모된 도시 파리에는 유럽각지에서 수많은 지성인들이 모이며 새로운 사상, 철학, 예술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배후에는 피렌체 메디치가문이 있었다면, 프랑스가 근대 예술의 문을 연 배경에는 파리 오스만시장의 도시개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지금의 파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다. 수없이 많은 굴곡을 겪으며 이루어낸 시민들의 합작품이다. 한국도 선진국대열에 뒤늦게 합류했지만 여전히 사는 것이 팍팍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다. 위기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사람과 사람이, 또한 환경과 더불어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시민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기회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