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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 람 Aug 07. 2018

바람의 길, 사람의 길 3

바람의 부녀 차마고도를 가다 3일 차 - 호도협

여행 3일 차-호도협의 EDM


6박 7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 감동의 여운을 가슴에만 담아 두기에 벅차 시작한 글쓰기인데, 쓰다 보니 너무도 초라한 느낌이다. 사실 KBS의 다큐를 보면서도 너무 답답했는데,  나의 짧은 글과 사진이 어찌 실재의 감동을 1/100만이라도 담을 수 있으랴. 나 자신과 함께한 딸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역할 외에 별반 큰일이 아닌듯싶다. 혹여 차마고도의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실망될까 두렵다. 개인 앨범에나 두어야 할 내용을 발간까지 한다는 게 사뭋 부끄럽다. 그래도 이왕에 시작한 일, 여행기의 마지막까지 달려볼 심산이다.  

소수민족 다리국 맥주

지난밤 저녁식사를 하면서 짤막하나마 나시족과 주변 소수민족에 대한 얘기를 일행과 함께 나누었다.

십여 년간을 무역일로 중국을 왕래했지만 막상 일이 아닌 여행은 처음인듯하다. 또한 다른 한국사람과 대화한다는 게 신선했다.  가능하면 조용히 경청하는 쪽을 택하였다.

중국 한족 사업 파트너와 뜻이 맞아 의형제를 맺으며 share the lives! 를 외치면서  비즈니스를 뛰어넘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시야를 크게 넓히지는 못했다. 다른 시각은 이번 여행이 주는 큰 선물이다.

제국은 늘 확장을 꿈꾼다.  억눌림은 또 다른 억눌림을 만들어낸다.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가치를 깨달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엔 오늘 내 눈앞의 현실을 너무도 커다랗게 느끼고 있는 소시민의 고뇌이다.

이 험한 길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나시족 사람들, 살기 위한 그들의 길과 그 뒤를 따라오는 제국의 확장.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들 소수민족 고유의 언어, 생활방식도 이젠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밖에 없다. 제국은 늘 새로운 이름으로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이름을 대체하고 있다.

제국에 속할 것인가? 제국과 공존할 것인가?

딱히 그런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가끔씩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제국처럼 느껴지는 이웃들 틈바구니에서 힘없는 조국을 갖은 나는 어떻게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렇게 먼 나라의 종교에 관심을 갖으며 성경을 몇 번씩 통독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갈 희망의 길을 찾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길을 걸으며 길을 묻고 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자신을 보면서 인간 한계의 나약함을 본다.

공존과 자신의 확장을 통해 안정감을 추구해온 인간 역사에서 공존보다는 자기 욕구가 지나친 자들의 기세가 드셀 때, 나는 묻는다. 그렇게 살아야 하나? 다른 삶의 방식은 없는 것인가?  강자가 되던지 아님 강자와 친해지거나 강자에게 속해지는 길 외 공존의 방법은 없는 것인가?

내 조상들은 어떻게 답을 찾아왔을까?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그 옛날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멀리 붓다의 법을 녹여 이 땅에서 삶의 가치를 세우고, 삼봉 선생과 율곡선생은 공자의 인을 조선의 가치로 녹였다. 가치를 세우고 녹일 땐 백성과 만민을 위하지만 그것이 무리를 짓는 정치논리로 변질될 땐 또 다른 강자와 약자로 나누는 도구가 될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가치가 더 이상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을 때, 동학과 서학이 이를 대체하는 듯했지만 열강의 제국주의는 그것을 충분히 우리의 내재적 가치로 성숙시킬 틈을 주지 않았다.

낡은 조선의 마지막도 그들 제국의 흉내를 내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지만 제국은 이름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결국 식민시대로 무너지고 독립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 남북으로 갈라진 반공의 가치,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군부와 함께 이룬 산업화의 가치, 그 산업화에서 군부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민주화의 가치 등.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치의 대혼란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내적 가치가 흔들릴 때 외세에 쉽게 무너진다. 면역력이 그만큼 약해진 탓이리라.

오늘날 촛불과 태극기의 갈등이라고만 하기엔 그 갈등의 골이 너무 깊게 느껴진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기 위한 가치, 하지만 존중해주고 싶고 대접해주기 앞서 조건과 자격 논리가 발목을 잡는다.  종파주의적 배타성이 타인에 대한 우리의 잔인함을 너무도 뻔뻔하게 만든다.

사실 갈등을 위한 답은 멀리 있지 않은데 말이다.

동서양 사람의 이치는 같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도 하지 않게 하라. 내가 받기 원하는 것처럼 남에게 대해줘라.

한 형제라고도 하면서 너무도 다른 북한과의 소통이 이슈화 되고 있는 이때, 생각이 많아진다.

괜스레 소수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다가 너무 거창하게 역사를 뒤적이고 있다.

서로를 좀 더 포용해주는 사회에 대한 작은 소망이 지나쳤나 보다.

그저 주어진 삶에서 지켜야 할 나 자신의 존엄성과 더불어 관계 맺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뿐인데 말이다. 여행은 사람을 사색가로 만든다.

19세기 구한말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쓰인 임금자 수녀의 장편소설. 우연한 기회에 직접 뵐 기회도 있었던 노수녀님의 책. 그 태도에 대한 많은 지혜를 얻은  책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이 시대에 속한 분이라 배경은 200년 전이지만 오늘의 사건처럼 현장감 넘치는 글로 엮어 내셨다.  책장의 책들을 장례 치르길 좋아하는 아내의 손길을 피해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해 구름과 함께 시간마다 변하는 산의 모습
새벽녘 산이 깨어난다
모네의 루앙성당이 연상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산 모습을 보면서 부지런히 펜을 놀려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네와 그의 루앙 성당 작품이 생각난다. 성당 외벽에 부딪치는 햇볕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성당을 보면서 모네는 아마도 미친 듯이 붓을 놀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색의 신비함에 취해 한바탕 놀았을 듯. 모네는 그래도 작품이라도 만들었지만 결국 나는 그려대던 펜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저 사진으로 씁쓸히 그 아쉬움을 달랜다. 내겐 옥룡설산이 루앙 성당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버켓 리스트가 생겼다.

이제 길은 내리막으로 접어든다
아침 햇살이 너무도 맑고 신선하다
꿩대신 닭이라고 야크대신 산양,  낯선 방문자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한적한 길 나귀만이 뒤를 따르고 있다
오랜 길을 따라 연결된 텅스텐광산 관로와 전기선, 과거와 현재
호랑이가 건너 뛰었다는 호도협

호도협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호랑이와 용이 싸우는 소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우렁찬 소리가 내 심장을 울리고 혈관을 통해 전신을 울려 퍼지게 만든다. 바위에 부딪치고 부서지는 물의 소리가 이런 전율을 선사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요즘 EDM 음악에 빠진 딸의 기분이 이러한 것일까? 대자연의 울림에 저절로 춤사위가 느껴진다. 함께 소리 지르고 춤추고픈 마음이다.

물과 바위가 만들어 내는 대자연의 교향곡 그리고 사람, 이들은  하나이다.

용감한 호주의 청년 8명은 이곳에서 래프팅을 시도했다가 아직도 나오지 못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간신히 딸아이를 달랬다.

정말 궁금했던 길 - 중장비 도움 없이 근육의 힘으로만 만든 길
산세가 확연히 달라진다
더이상 호도협이 아니다. 잔잔한 계곡이 강이 되어 흐른다
센과 치히로 상상력이 여기서 시작한 것 아닐까?

마음 같아선 하루 이틀 더 걷고 싶은데, 트래킹 일정은 오늘 호도협까지이다. 이제 내일이면 오지의 목(木)씨 성을 가진 집성촌 마을 석두성 마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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