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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운 Mar 11. 2021

<해변의 피크닉> 평론

손보미 작가 작품


             손보미 작가의 <해변의 피크닉> 평론이다. 한 소녀의 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혼자 사는 어머니, (거의) 혼자 사는 할머니, 육체만 아름다운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등, 페미니즘 운동의 교조서로 쓰인다면 충분히 쓰일 만한 소재들이 많지만 자신의 말마따나 과장 없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써내려간다. 자신의 치부까지도. 소녀의 시각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분노가 누적이 되고, 이는 소녀의 어설픈 승리가 아닌 어른들의 성숙한 대처로 매듭지어진다.

             소설의 시작은 딸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편모 가정의 클리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성숙한 소녀는 허영심이 있고 어리석은 편모를 이미 파악 완료한 상태다. 마치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당당한 10대 여성이 어리석은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풍파를 헤쳐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가 수상한 기운을 풍기는 엄마에 의해서 부산 할머니댁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성숙한 피해자인 아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어른들의 모순들이 조명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많은 소설들이 ‘약한 피해자’와 ‘강한 가해자’ 프레임을 중용하기 때문이다. 아마 손보미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클리셰 요소들을 소설 초반부에 작업하여 플롯 상의 반전을 추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윽고 아이는 할머니댁에 도착하여 마찬가지로 수상쩍은 인물인 삼촌을 만나게 된다. 아마 여기까지가 구성의 주된 빌드업이다. 삼촌은 ‘아이의 엄마가 받은 대가’를 언급하며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숨겨진 모종의 음모를 암시한다. 이에 소녀는 불안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긴장감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인간상의 파국이 아니라 사춘기를 맞은 소녀의 심정적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삼촌은 성인 남성으로서의 성적인 존재로, 어머니는 무력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주는 존재로, 할머니는 소녀가 나갈 사회적 군상으로서 그녀의 성장을 돕는다.

             할머니 댁에 가기 전, 소녀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때 독자들이 주목할 점은 그녀가 몹시 부러워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주목하면, 다소 어려운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아이들 간에 벌어지는 성 선택 행위에서 소녀는 몹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며, 이게 소설의 가장 중요한 갈등 사건이자 구상적 사건이다. 추후에 등장하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이를 보충하는 사건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이는 이런 불안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만, 어머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비약해버리면서 아이가 다시금 불만을 축적하게 하는 요인을 제공한다. 그래서 소녀는 초반 내내 어머니에 대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한다거나, ‘불편하다’식의 태도를 견지한다. 물론 어머니와 소녀 간의 대화 갈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소녀의 불만은 학교에서의 성 관계, 그리고 배가 빵빵한 남자아이의 배꼽을 알고 싶은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소녀가 이를 해소한 채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는 당신 모습, 그리고 당시 소녀의 태도에서 반증된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초반의 갈등은, 후반의 부가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할머니 댁에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그분들 기분을 거스르지 마라”는 대목에 소녀가 큰 의미 부여를 하게 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 때문에 배반의 의지를 품게 된다), 삼촌의 ‘대가’ 발언에 첫째로 흔들리게 되고, 나중에 가서는 심지어 자신이 할머니에게 큰 배신을 감행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해변의 피크닉>에서 극적인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이라 함은, 소녀가 삼촌에게 직접 해변으로 초대할 때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대신 할머니 댁에 도착한 이후로 소녀에게는 두 가지 주된 ‘인상’들만이 주어진다. 이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아주 강한 인상들이다. 첫째는 어머니를 대체하고, 높을 확률로 초월하는 역할로서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그녀 말마따나 모든 것의 주인 된 태도를 갖춘 부유한 귀족이다. 동시에 소녀에 대한 통제권을 어머니보다 강하게 행사할 줄 알며, 어쩌면 어머니보다 소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할머니를 통해서 소녀는 자신이 당신을 ‘사랑한다’ 생각하기도 한다. 소녀의 든든한 정서적/사회적 버팀목이 되어 주는 인물이다. 초기에 할머니는 삼촌과의 갈등 각을 세우며 파국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삼촌과 표면상으로라도 화해를 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소녀의 마음 새를 단단히 붙잡아준다. 그래서 소녀는 더 이상 조숙한 숙녀가 아니라 마음 놓고 울어도 되는 무방비한 아이 상태가 된다. 어쩌면 소녀는 조숙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나이에 걸맞는 아이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지속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삼촌에 대한 ‘사랑’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촌에 대해서 처음부터 소녀는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정확히 말해서는 호승심에 가깝다. 삼촌은 지저분한 인상착의에, 소녀를 유일하게 ‘특별히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엄마의 대가를 거론하는 등, 초반부터 짓궂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인상은 아주머니로부터 ‘난봉꾼’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서부터 깊은 탐구심으로 이어진다. 소녀는 마침 성에 한창 눈을 뜨던 시기였기에, 젊은 삼촌의 자유로운 성생활은 그녀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던 셈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는 ‘수치심을 느끼기 싫었다’고 밝히며 삼촌을 향한 관심이 호승심이라고 주장하지만, 소녀의 서술은 이번에는 그녀의 말마따나 완전히 충실하지는 못했다. 할머니에 대해서 소녀가 완전한 아이가 되어도 좋다는 안정감을 느꼈다면, 삼촌을 통해 소녀는 성숙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반대의 욕구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이 사전에서 오려 놓은 단어들을 숨기면서 부끄러움을 배우고, 삼촌이 해변에 아름다운 성인 여자를 데리고 오자 질투심을 느낀다. 이에 대한 강력한 증거는 소녀가 앞으로 더 이상 ‘충청도 여자’에 대해서 농담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자신이 농담의 당사자가 된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마주한 성에 대한 불안을 다시금 부산에서 마주하며, 소녀는 할머니 옆에서 돌아오는 길에 울음을 터뜨린다.

    결과적으로 소녀가 품었던 많은 불안과 불만들 – 어머니와 성에 대한 – 은 부산에서 상당 부분 해소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초반에 잠깐 등장한 배가 빵빵한 남자아이는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왜 그 아이가 옷을 그렇게 입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건 그 아이 부모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즉, 부산 여행을 통해 소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에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이다. 오혜진에 따르면, 순수문학은 빠르게 변화하는 밀러니얼 세대의 관심사 중 가장 후순위에 위치한 문학이다. 여타 문학에 대한 위계화를 고집하면서도 세계시장에서 성과를 내려는 후진국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교조주의, 애국주의 등의 전통적 질서에 골몰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건전한 오락성은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에 페미니즘과 퀴어 이념을 중심으로 일종의 혁신이 일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애초에 시작부터 특정 집단의 이념이기에, 문학으로서 예전처럼 보편적 대상을 감화시키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손보미 작가의 작품은 내가 최근에 봐 온 순수문학 작품 중에서 단연코 뛰어나다. 보편적으로 공감할 법한 소재들로 공감할 법한 이야기를 써냈지만, 전혀 교조주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오락성이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라 읽는 내내 빨려 들어갔다고 느꼈다. 앞으로 이런 ‘순수한’ 순수문학들이 문단에 많이 등장해서 둘로 쪼개진 광장을 봉합하는 나팔수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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