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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운 Mar 19. 2021

욕망하는 것 vs 욕망되는 것

우리가 코타키나발루로 떠날 수 없는 이유

어렸을 적부터, 나는 욕망이 딱히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손을 잡고 사촌 동생들과 함께 나를 가게로 데려가면, 남들은 여러 개를 사달라고 조르느라 여념이 없을 때, 나는 딱 한 개만 골랐다. "더 골라라, 묵아." "전 이것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께선 그럴 때마다 내가 신기하셨나보다. "허허, 이놈 참 특이하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욕망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욕망이 너무 커서 그런 건지.


성인이 된다는 건, 욕망이 자꾸만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또래와 함께 자라며, 많은 욕망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중학생 때 처음 여성을 만지고 싶은 욕망을 느꼈고, 고등학생 때는 또래 남성들을 추월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대학생 때는, 이 세상에서 나의 안정된 터전을 확립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지배한 욕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다 가진 남성'을 볼 때 느끼는 열등감이었다. 이 열등감은 내 인생 최대의 원동력으로서, 잠이 오거나 게을러질 때도 지체 없이 내 정신을 들게 해주었다. 하지만 욕망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며, 내 안에는 커다란 의구심 또한 함께 쌓여갔다. 왜냐하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선 항상 또다른 욕망의 희생을 실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 바로 게으름/나태에 대한 욕망이다.


아주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 학교를 가라고 깨울 때면 가끔은 너무나도 일어나기 싫은 날이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그럴 때면 이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끝낼 수 있을지 계산해보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께선 식탁에서 아침밥을 드시며, '평생'이라고 말씀 해주셨고, 나는 크나큰 좌절에 빠졌다. 어린 마음에 모든 것이 괜스레 허황되고, 또 너무나도 슬프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래서 하루는 아예 결석을 할 작정으로 온갖 꾀병과 궤변을 쏟아냈다 -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내 꾀를 눈치 채신 것 같았으나, 모른 척 해주셨다. 나는 바람대로 그날 등교하는 친구들을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한 아침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 아무것도 안하고 늦잠을 퍼잘 때는 개운했다. 내가 좋아하는 <명탐정 코난> 시리즈를 TV로 마음껏 볼 때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전 내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전 시간이 다 니자가자 이 또한 몹시 지루하다고 느꼈다. 무엇을 할지 몰라 학교 근처를 무작정 가봤다. 운동장에서 친구들은 점심시간을 맞아 뛰놀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 같다 - 의무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나도 저 무리에 끼여서 뛰놀고,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강렬히 소망했다. 그 뒤로는 학교를 절대 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혹은 이탈에 관한 나의 호승심은 쉽사리 말소되지 않았다. 대학교에 와서는 '무리' '소속' 대한 기준이 상당수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군대라는 '소속감' 충만한 집단을 거치면서 집단과 무리에 대한 나의 반감은, 기존의 일탈 정신에 기름을 뿌리는 꼴이 되었다.  전역 , 코로나가 바로 덮치자 나는 소속감 충만한 인간에서, 어디에도 소속이 되지 않은 무적의 신세가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토록 꿈꾸던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나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동시에 어렸을 적 품은 의문도 다시 수면 위로 따올랐다. ‘굳이 무얼 해야 하나...?' 대체  내가 도심  회색 건물들로 들어가서 매일 같이 스스로를 스트레스의 상황에 몰아넣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렇게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사람들로 가득한, 회사나 도시 사회 속으로 스스로 우겨넣어야  정도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그냥 코타키나발루로 떠날  없는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욕망이 설정되었는지, 아니면 욕망이 설정된 후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고 느꼈는지 나는 아직   없다. 왜냐하면  자신조차도  내가 코타키나발루로 떠나지 않는지, 또한 여러 질문들에 확답할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대학 선배들을 만나서 그들이 치열하게 사회에서 이루고 있는 업적들을 전해 들을 때면, 혹은 미디어에서 인간 승리를 이룬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 대한 열등감과 호승심이 다시금 발동한다. 돈도 벌고, 허세도 부리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을 나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욕망과 해소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과정을 거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다.


"왜 우리는 그냥 코타키나발루로 떠날 수 없는 거지?" 대학 동기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쪽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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