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

만만하다는 것

by 시우

한때는 제발 내가 사납고 거칠게 보였으면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로 인한 귀찮은 일들이 줄어들 것 같아서였다. 대개 만만하고 순해 보이면 손해를 보거나 본의 아닌 시달림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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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인중이 넓고 깊은 데다 얼굴 인상이 사자를 닮았으나 아주 위트 있던 교수님 한 분의 말씀이다. 가끔 외국인 손님이 와서 함께 식사를 대접하거나 예의상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다들 영어 울렁증으로 고민들을 하지만 자신은 끄떡없다고 하셨다. 떡하니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눈길을 내리깔고 있으면 아무도 자기에게 말을 감히 걸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아마 그런 사람에게는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살다 보면 그뿐만 아니라 귀찮은 시달림을 줄이는데도 척 봐서 야물어 보이거나 여간내기가 아닌듯한 모습이 더 효과적이다. 한데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반대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늘 시장에 가면 좌판 아줌마들에게 둘리고 백주대로에서 어설픈 사기꾼의 황당한 제의를 받기도 한다.


오래전에 인근 도시에서 약국을 했기 때문에 몇 년간 버스 통근을 했다. 벌써 30여 년 전이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온갖 잡상인들이 직행버스에서 활개를 쳤다. 한 번만 바르면 10년 묵은 피부병이나 무좀도 한방에 낮는다는 피부 명약에서부터 일시에 성인병을 낫게 한다는 스위스며 미국의 노벨상 수상 과학자가 보증한다는 수상쩍은 캡슐약, 그리고 때로는 번쩍거리는 금장 시계까지.


일단 완산동 버스 정류장에서 두세 명의 정장 입은 남자가 탄다. 이들은 휘황한 알이 박힌 금반지를 꼈거나 이브 생 로랑 로고가 선명한 명품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난 이들이 멘 짝퉁 넥타이를 보면 먹고살고자 애쓰는 이 땅의 서글픈 가장들 속내가 비치는 듯해서 측은했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출발하면 가장 화려한 외모의 아저씨가 먼저 황금빛 시계 찬 손목을 올리며 연설을 시작한다. (난 이때쯤 눈을 감고 자기 시작한다) 그 내용인즉슨, 수출만 해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고급 시계를 사은의 뜻으로 OO 회사에서 홍보 차원으로 직접 고객분들께 무료로 드린다는 것. 단, 다는 드릴 수 없으니 나눠드린 번호에 당첨이 된 세 분들께만 특별히 드리되 10%의 부가가치세만 내시고 거저 가져가시라는 것. 그 대신 꼭 OO회사를 널리 홍보해주시라는 당부의 말까지. 그리고는 번쩍이는 금장시계 케이스를 들어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그 기능과 수출되는 어마무시한 원래 가격을 소개를 한다. 이미 이 말이 끝날 때쯤이면 나머지 두 명의 아저씨들이 승객들에게 번호표를 죄다 돌린 후다.


"자, 이제 행운의 번호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격앙된 말과 분위기로 버스 안의 승객들은 이미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선이 집중된 상태다. 누가 당첨될 것인지 기대가 만발한 가운데 그 앞의 아저씨는 발을 탕! 굴러가며 무작위로 크게 번호를 호명한다.

" 12번, 3번, 25번!!! 자 어디 계세요? 손, 손을 들어주세요."

온 승객의 부러운 눈길이 쏠리고 그 남자들은 당첨자에게 다가가 시계를 건네주며 부가가치세(!)를 챙긴다.

아, 난 그 얼마나 확실한 100% 당첨자였던가!


처음에는 그런 시계는 내 취향도 아니고 쓸모가 없어서 당첨되어도 모른 체했고 나중에 보니 이게 순 사기꾼들이구나 싶어서 무시했지만 내 번호만큼은 변함없이 늘 당첨이 되었다. 품목을 바꿔가며 차에 오르는 모든 판매상들에게. '요것들이 날 뭘로 보고...' 싶어서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나중에야 이들도 내가 통근하는 줄을 알았는지 나를 비켜갔다.

몇 년 전에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또, 내 번호가 당첨이 되었다. 이 나이에도 내가 그리 어수룩해 보이는가 싶어 속이 상했다.

내 친구 하나는 주머니에 돈은 없고 군에서 휴가 나온 때가 하필 아버지 생신 때랑 겹쳐서 고심하던 차에 마침 버스 안에서 그들을 만났다. 구세주를 만났구나 싶어서 얼른 시계를 부가가치세만(!) 내고 웬 떡이냐 하며 샀다. 모든 비상금을 죄다 털어서.

금장 시계를 받은 아버지는 입이 함박만 해지셨는데, 글쎄 다음번 휴가 나와서 봤더니 시계가 장식장에 들어가 있더란다. 서 있는 상태의 시계를 그냥 '아들이 선물한 시계'라는 기념품으로.


요즘은 그런 야바위꾼들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버스를 잘 타지 않고 또 돌아다니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고, 아님 이젠 그런 수법은 시골 촌부에게도 먹히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한데 수상쩍은 건강식품을 터무니없는 값에 사들고 약국에 와서는 값이나 효능을 물어보는 할머니들을 보면 노인 상대 건강식품 판매 쪽으로 새로이 진출을 한 거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난 지금 이 나이에도 여전히 수시로 둘리고 속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겉은 크고 싱싱해 보였는데 그 아래 것은 죄다 시들고 형편없는 열무단을 넙죽 산다거나 햇밤이려니 믿고 샀는데 묵은 밤을 팔아먹은 거였다거나, 머리에 선명한 다이아몬드 형상을 가리키며 국산 조기라 해서 비싸게 샀는데 맛이 영 달라서 보니 아니었다거나 엄청난 기능의 신제품이라 해서 덜렁 들여놨는데 나중에 처리 곤란한 물건일 뿐이라든가 등등.


한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야 버리면 되고 좀 손해 보면 뒤끝이 없는 것들이지만, 만만한 데다가 어리석기까지 한 내가, 사람을 쉽게 믿고 잘못 들어선 길이나, 처음 잘못 채운 단추 때문에 끙끙대며 보내야 하는 시간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그러는 내가 늘 못마땅해서 속상하고 징징댔었는데 나이 들며 그런 찌질한 나조차도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하고 다독여줘야 할 것 같다. 그냥 좀 우습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안쓰럽다.


하지만 만만해서 쉽게 보이는 데다 지혜롭지도 못한데 여기까지 길 잃지 않고 온 것만 해도 어디인가.

"네 깜냥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애썼다. 이만큼이나마 살아내서 참 다행이다."라고 나를 다독이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다.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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