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이 피었겠네.'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여름이 온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그 생각을 하다니.
새벽에 가까운 연못을 찾았다. 초등학교적에 자주 와서 놀던 노송 숲과 연못이 세월이 지나며 시민 공원으로 바뀐 곳이다.
연못 초입의 다리에서부터 푸른 여름이 무성하다. 곧게 자라 우거진 왕골 잎이 내 키를 웃돈다. 윤기 나는 초록으로 연못 가의 나뭇잎도 싱그럽다.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이 만개해있다. 붓을 닮은 뾰족한 봉오리부터 벙글기 시작한 꽃이 대부분이고 이미 지기 시작해서 씨방을 드러낸 꽃도 한 둘 눈에 띈다. 연향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낮 같으면 좁은 다리라서 난간에 서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 통행에 지장을 줄까 봐 그저 지나기만 했던 곳에 느긋하니 서서 물을 내려다본다.
새벽이라서인지 전에 없이 오리나 물닭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무성한 연잎 아래로 또 다른 세상이 분주하다. 오리는 열심히 뭔가를 쩝쩝거리며 수면 아래 두 다리가 바쁘다. 물닭 역시나 가족을 이루었는지 두 마리가 푸른 그늘 아래로 먹이를 찾느라 분주하다. 전에는 청거북이가 주로 보이더니만 오늘 보니 내 얼굴보다도 더 큰 자라에서부터 손바닥만 한 자라가 무척 많다. 갑자기 커다란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사람을 놀라게 한다. 물고기들의 아침 운동인가 보다. 팔뚝 크기만 한 가물치에다 잉어인지 붕어인지 유유히 기품 있게 유영하는 거대한 물고기. 작고 무리를 이룬 피라미 크기의 물고기 떼까지 물속 세상은 다채롭고 풍성하다.
집에 묵은 보리쌀이 있다. 작년에 먹다가 둔 것이 상당히 있는데 가지고 와서 연못가의 비둘기나 참새들도 먹이고 물속 녀석들에게 주어도 좋을 거 같다. 다음번에 올 때는 꼭 잊지 않아야겠다.
한참을 재미있게 수면을 들여다보다가 느긋하니 연못가를 산책했다. 흐드러진 연꽃 가운데 있는 작은 정자에서 좀 앉아 쉬고 싶은데 나보다 먼저 자리한 사람이 있어 지나친다. 작은 책을 든 젊은이인데 시집이 아닐까 혼자 상상해본다. 한적한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자니 눈도 코도 그리고 맘도 한가롭다.
여전히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되돌아 나오다가 어려서 놀던 정자 앞에 선다. 친일파 박 아무개가 당시 이 연못을 사유화해서 자신의 환갑 기념으로 지었다는 이 정자에 대한 유래가 앞에 적혀있다. 그런 내역을 이제야 안다. 이 정자는 나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 때 새벽 조기청소 구역이었다. 그때 올라와본 이래 늘 바라만 봤지 올라볼 기회가 없었다. 한때는 아예 정자에 오를 수 없게 했었는데 "신발 벗고 올라오세요."라고 쓰인 것으로 봐서 정자를 개방했나 보다. 올라가서 보니 정자 안쪽으로 죽 둘러서 툇마루도 놓고 바둑판도 놓인 것으로 봐서 근처 어르신들 사랑방 구실을 하나보다. 시선이 높아지니 연못 풍경도 다르다. 툇마루에 누워 고운 단청도 보고 양 편에 있는 청룡상도 보고 서늘한 마루에 등을 대고 누워있자니 마땅해서 일어나기가 싫다. 연향은 바람에 코끝으로 날아들고 여름 새벽의 공기는 청량하다. 툭 트인 호수는 평화롭고 내 자리는 쾌적하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이미 떠오른 아침해를 보며 귀가한다. 불과 2시간도 못 미친 나들이에 내 맘의 공간은 무한정으로 넓어져 있다. 향과 색과 소리까지 곁들여서.
언제 비 오는 새벽에 다시 가볼 생각이다. 묵은 보리쌀을 가지고 가서 연못 식구들을 먹이고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도 우산 쓰고 한 없이 바라보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다. 여름은 이런 맛이 있어서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