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꽃과 어설라 할머니

작고 섬세한 배려

by 시우

고등학교 때 교화가 은방울 꽃이었다. 배지에도 은방울꽃이 새겨져 있었다.

꽃말이 "행복, 순결, 섬세함, 행복이 오다"라는데 실물을 본 적은 없었다.

우리 실생활과는 먼 꽃이었다.


몇 년 전 에스토니아에서인가 이 작은 은방울꽃 묶음을 파는 노점상을 보고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이런 소박하고 작은 꽃다발을 누가 사갈까?' 싶어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듯 작은 꽃다발이다.

나중에 듣자 하니 유럽에서는 5월에 은방울꽃으로 만든 꽃다발은 행운을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다고 한다.


이번 여행 중에 스위스 한 산골 마을의 B&B에 들어간 날.

70은 넘어 보이는 집주인 어설라 할머니는 이것저것 곱게 관리된 집안을 소개해주고 사용법을 자상하니 일러주고 나가셨다. 나가신 후에 보니 현관 앞의 장식장 앞에 은방울꽃이 작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방금 꽂은 듯 싱싱했다. 그 작고 소박한 꽃 하나로 난 그 집과 주인 할머니가 이내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할머니 내외는 스위스의 전통 가옥인 샬레에 살면서 집의 반쪽을 B&B로 빌려주고 있었다.


그 집에 머문 동안 할머니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햇살이 화창한 날은 새벽에 집 앞의 야외 테이블에 비치파라솔을 준비해주기도 하고 비가 오면 치우기도 하며 보이지 않게 신경을 써주셨다.


화병은 하도 작은 유리병이라서 물은 금방 줄어들었다. 행여나 꽃이 시들까 봐 물을 아침저녁으로 갈아줬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은 꽃줄기의 끝을 살짝 사선으로 다시 잘라줬다. 좀 더 꽃을 오래 싱싱하게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다행히 우리가 떠나는 날까지 꽃은 시들지 않았다. 체크 아웃하는 날 아침, 은방울꽃 화병에 새 물을 갈아줬다. 섬세한 마음씀에 감사함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한데 최소한의 짐을 꾸리느라 작은 스케치북 하나 넣어가지 않아 종이가 없었다. 소지품을 죄다 뒤져 프린트한 A4용지에서 반장의 여백을 발견하고 은방울꽃 그림과 작은 메모를 남겼다.

역까지 배웅해주러 차를 가지고 나온 할머니께 카드라기도 뭐한 메모지를 전해드리고 왔다.


B&B 공식 페이지에 할머니의 게스트에 대한 후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메일을 따로 보내셨다. 집에 잘 돌아갔냐는 안부와 언제든 다시 오면 환영한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언제 내가 다시 그곳을 찾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눈치 볼 것 없이 내가 망설였던 일들을 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실패한 퐁듀 요리법을 물어본다거나 불고기를 맛보시라고 좀 드린다거나, 어쩜 그렇게 집 관리를 잘하셨느냐며 산골 생활에 관한 수다를 떤다거나..... 뭐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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