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것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책이 있다. 80년대 외국 여행을 갔다가 귀국했는데 작가의 가방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었다.
그 가방 안에는 별거 없이 온갖 여행 후의 빨랫감이 가득했다. 결국 찾지 못하고 만 이 가방으로 인해 다음부터는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간단한 빨래는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 게다가 독일 항공사는 해마다 분실되어 주인을 잃은 가방에 대해 경매에 부친다는데 혹시라도 그녀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올 퀴퀴한 빨랫감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이야기까지.
한데 즐겁게 읽었던 "잃어버린 여행가방"이 바로 내 일이 되었다. 그것도 여행 초반에 타인의 실수가 아닌 내 불찰로.
여행의 첫날 제네바에서였다. 딸의 짐을 미리 챙겨 올 목적으로, 출국할 때 커다란 빈 가방을 가져갔었다. 그 가방에는 딸이 먹을 마른 식재료와 인스턴트식품 몇 가지만이 들어 있었다.
공항 근처 호텔에다 우리 짐을 풀은 후 그 가방을 가지고 딸의 기숙사로 짐을 챙기러 나섰다. 한데 전차 안에 가방을 두고 내린 것이다.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가방을 두고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기숙사에 도착한 후였다. 가방 손잡이에 부착했던 전화번호가 쓰인 네임카드도 다 떼어냈고 가방의 잠금장치도 풀어놓은 상태였다.
일단 시의 분실물 센터에 메일로 분실 신고를 하고 혹시나 싶어 터미널의 분실물 센터로 직접 가 보았다. 친절한 직원은 마침 그 코스를 운전하는 친구가 있다면서 직접 전화로 문의도 하고 수소문도 해주었지만 버스 회사에도 분실물은 들어오지 않았단다. 혹시나 해서 공항을 오가는 그 10번 전차를 정류소에 지켜 서서 몇 대 눈여겨보았지만 진회색 커다란 캐리어가 실린 차는 없었다.
낙심하고 어쩔 수 없어 가방을 포기하고 말았다. 잠금이라도 해놨다면 몰라도 쉽게 열리고 이름표도 없는 텅 빈 새 가방이었으니. 누군가 가져갔다면 차라리 잘 쓰기를 바랐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리고 다녀야지' 새삼스레 각오도 다졌다.
그러나 그렇게 주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리는 것은 가방뿐이 아니었다. 한 곳에서는 냉장고에 넣어놓은 김치와 된장이 든 팩을 송두리째 놓고 오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샴푸를 놓고 왔다. 값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긴 여행을 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죄다 포기하더라도 진짜 잃어버리면 곤란한 "지갑과 여권 그리고 휴대폰만이라도 꼭 챙기자"는 맘에 서로 교차 확인까지 하며 다녔다.
나 자신의 부주의함에 속이 좀 상해서 그렇지 실제 그것들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여행에 큰 지장을 받을 일은 없었다. 가방은, 속이 좀 짜지만 귀국 때 하나 새로 사면 될 것이다. 나머지도 아시안 마켓에서 벌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 몸과 함께 내 맘을 챙겨서 데리고 다니는 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내 몸과 떨어져서 제멋대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미래로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니는 탓에 말이다. 몸은 여기 있으면서도 오롯이 지금을 즐기는 일은 불가능할 만큼 어려웠다. 사실 어찌 여행에서뿐이랴만.
실제로 인간은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던가. 머리만 어질러질 뿐 아무런 의미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잡념들. 아니, 도움은 커녕 삶에 백해무익하고 도통 기억조차 안 남는 잡생각에 빼앗기는 내 시간은 그 얼마나 많은지. 그 어떤 것으로도, 도저히 벌충할 수 없는 이 시간들.
여행을 마치고 귀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제네바에 들렀을 때, 혹시나 싶어 시에서 운영하는 분실물 센터에 들렀다. 주인 잃은 모든 분실물은 이곳으로 보내지고 보관 기간은 1년이라고 했다. 찾으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맘이라도 들게 허실 삼아 간 거었다. 한데 그곳 보관 창고의 선반에 내 가방이 얌전히 있었다. 가방을 확인한 순간 그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가 확 날아간 기분이었다.
이미 신고한 물품이라서인지 10프랑의 보관료만 내고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이 제네바라는 도시, 스위스라는 나라 그리고 여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참으로 괜찮게 느껴졌다. 품격 있게.
허투루 보낸 시간, 잡념에 허비한 시간, 방향을 잃고 허둥대느라 지나친 시간을 보관했다가 돌려주는 보관소는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