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텃밭
오월 하순;
아침 새소리에 취해서 느긋하니 누워있다 보니 그새 6시 반이 훌쩍 넘어 햇살이 이미 번져있다. 천변 대신 나무 그늘을 찾아 앞 산을 오른다. 아파트 담장을 벗어나 산에 오르는 길 옆으로 노란 호박꽃이 한창이다. 저번에 내린 비로 잡풀도 호박 넝쿨도 청청한 기세로 쭉쭉 뻗고 있다. 한 50평 남짓한 오르막 길가 밭은 요모조모 알뜰히 가꾸어 싱싱한 작물들로 기름지다. 머리에 수건을 쓴 아주머니 한 분이 일찍 나와 썩힌 거름을 주고 계신다.
낮은 산 초입은 얼마 전만 해도 개망초 흰 꽃무리가 안개처럼 깔려있고 밤꽃 냄새가 진동하더니만 그새 밤꽃은 흔적도 없고 개망초꽃도 시들하다.
녹음 덕에 아침 햇살에도 산길은 그늘져 서늘하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완전히 깨어난 햇살에 푸른 잎 사이로 활짝 피어난 호박꽃이 눈부시다.
어릴 적에는 여름밤이면 동생이랑 호박꽃 등을 만들며 놀았다. 열매를 맺을 암꽃은 피하고 지천으로 피어난 수꽃을 따서 안에 반딧불이를 넣은 후 꽃을 오므려 묶어 들고 조용히 기다렸다. 안정을 되찾은 반딧불이가 꽁무니에 불빛을 다시 내면 서서히 밝아지던 호박 등. 황홀하게 아름답던 그 황금빛 꽃등이 생각났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데 그때까지 거름을 주며 밭을 손질하시던 아주머니가 묻는다.
"에고 뭘 그런 걸 찍는디야."
"호박꽃이 예뻐서요. 한데, 죄다 수꽃뿐이지 암꽃이 안 보이네요."
"여기 하나 있어."
라며 건너편 넝쿨을 헤쳐주신다. 그 아래로는 열매를 맺고 시들어가는 또 다른 암꽃이 있다.
그 옆에는 아직 아침이라 활짝 피어난 분꽃이 후북하다. 마치 유년의 텃밭에 온듯하다. 분꽃도 가지도 죄다 눈에 익은 채소들이라 반갑다.
호박 넝쿨이 널브러진 밭둑 안으로 어린 대파, 가지, 생강, 이미 꽃이 핀 쑥갓, 막 넝쿨을 뻗는 고구마, 콩잎, 고추 등등이 보인다. 얼핏 보니 칸나를 닮은 작물이 눈에 띈다. 밭에 꽃을 심었을 리는 없어 물었더니 강황이란다. 여러모로 건강에 좋다고 해서 심었다고.
"죄다 우리 어릴 적에 텃밭에서 쉽게 보던 것인데 강황만 새롭네요. 자주 오가며 누가 이렇게 밭을 잘 가꾸나 궁금했는데 아주머니네 텃밭이었네요. "
"내 땅은 아니고 노는 땅이 아까워서 내가 짓는다고 했어. 쥔이 집을 짓는다면 하시라도 비워주기로 하고."
요즘 앞의 아파트 재개발로 이 근처 땅값이 들썩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남의 땅을 빌려 짓는 농사라니 내가 다 서운한 맘이 들었다."
"땅이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사람이 임자지요."
라며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어디 사느냐 물으시더니 이리 오라며 대궁이 이미 솟은 상추를 뜯기 시작한다.
"별거는 아니지만 지금은 상추가 귀허니께 먹어봐. 농약, 비료 하나도 안 주고 거름 줘서 기른 거니 깨끗혀. 대궁이 솟아 이것도 곧 못 먹겠구먼."
감사한 마음으로 상추 한 줌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어릴 적 우리 텃밭은 이웃들이 허락 없이도 들어와 밭고랑 풀을 매고 한창 자란 상추나 쑥갓 아욱 등속을 솎아 식구 적은 우리 먹을 만큼만 마루 위 소쿠리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식구 많은 자신들이 가져가곤 했다. 때로는 양약스럽게 너무 많이 똠방하게 뜯어갔다 싶어도 이삼일 지나면 이내 밭에 한가득 불어나 후북하곤 하던 상추다.
집에 돌아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방금 뜯어 잘린 줄기에 아직 뜸물 같은 흰즙이 송송 맺혀있는 상추를 씻는다.
마치 유년의 텃밭을 지나온 듯 마음이 싱싱해진다.
몸으로도 맘으로도 한여름이 느껴진다. 그때 그 싱싱하고 짙푸르게 솟아나던 여름의 빛깔과 향기가 넉넉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