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그땐 그랬어

by 시우

가끔 시간이 넉넉하고 날씨가 좋을 때는 걷는 것이 즐겁다. 내 발로 내가 정한 목적지나 방향대로 이 땅을 선들선들 걷는 것은 얼마나 주체적이며 건강한 행동인가. 주로 집 가까운 천변이나 앞의 산을 걷지만 가끔씩 천변 너머 시내까지 이어진 오래된 주택가의 골목골목을 걸어보는 것은 요즘 들어 생긴 새로운 즐거움이다.


시간이 박제된 듯한 구 주택가의 골목길들. TV 응답하라 시리즈물의 실제 활동무대 같은 풍경이 아스팔트 대로에서 10미터도 안 떨어진 골목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사이에 남은 주택가는 대개가 2,3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춘 채 남아있다.


골목은 동네가 품은 시간이 그대로 비친다. 지금은 노인이 된 그 집의 주인들이 젊었을 적 풍경 그대로. 여름 같으면 좀 넓은 골목 쪽에 자리한 대문 옆에 평상이 놓여있고 좁은 골목이지만 담장 아래는 흙을 돋워 쪽파나 상추를 심어뒀다. 오래된 아기용 욕조에 흙을 담아 푸성귀를 심기도 하고 올망졸망 스티로폼 박스에는 정성껏 꽃이 심어져 있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골목을 지나서 초, 중학교를 거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감색 교복에 무거운 가방과 도시락을 들고서 지나다니던 그 골목 풍경은 빛이 바래고 낡았지만 누추함이나 불편함을 느끼기 이전에 반가움과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그저 모든 게 아쉽고 모자라고 귀하던 때라 좀 불편했을 뿐. 아마도 그리움과 애잔함을 한 자락 깔고 기억되는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 70년대 초반 서울의 산꼭대기 판자촌을 가본 적이 있다. 사연이 있어 늦게야 알게 된 친척 이모의 집이었다. 늦은 저녁에야 그 동네에 도착해서 엄마랑 비탈진 좁은 골목을 한참이나 올라 산동네를 찾아갔었다.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동네를 둘러보려고 나갔다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접했다.


여름이었는데 세수도 안 하고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후줄근하고 속이 훤히 비치는 파자마 차림의 남자가 좁은 골목 가에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고 그 동네 분위기가 대충 그랬다. 다들 집에 마당이나 대문이 없으니 그저 골목을 향한 부엌문이 그 집의 출입문인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나 여자들도 내 눈에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예의나 염치 같은 것도 없는 차림새나 행동, 오가는 말까지도 상스런 동네 풍경. 도시의 밑바닥을 구경한 느낌이었다.

이모 집에서도 그 동네 어디서나 나는 듯한 연탄가스 비슷한 냄새가 났고 뭔가 겉은 그럴듯하지만 진짜는 하나도 없는 집안의 집기에서부터(냉장고를 꼭 빼닮은 쌀통이랄지) 사는 모습까지 어린 내 눈에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골목골목마다 미로처럼 엮여 있어서 찾아들기도 힘들었다.

오래전 집이 망해서 중심지에서 변두리 산 동네로 들어갔던 그때 느꼈던 이질감은 이에 대하면 비할 바도 아니었다.


맨 처음 그곳을 찾으셨던 할아버지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하시며 속상해하셨단다. 다행히 이모의 남편 되는 분은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이모는 몇 년 후 그 판자촌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서울의 달동네, 판잣집 골목 하면 숨이 탁 막히지, 정감 있고 어쩌고 따위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내게 연상되는 골목은 기다랗게 이어지는 동네 주택가의 길이자 넓은 공터나 큰길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사람의 실핏줄과 같은. 그리고 아무리 없이 살아도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배려나 염치가 살아있으면서 서로 오가는 정으로 풋풋한 동네의 그런 골목길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골목 대용으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예전처럼 아이들이 모여서 어울려 노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려서부터 너무 배우는 것이 많고 바빠서일까. 싱싱한 아이들의 그 활발한 에너지를 막힌 교실 안에서 맘껏 발산할 수 있을까? 그런 아이들의 심신이 건강할 수 있을지, 행복할 수 있을지 난 궁금하다.

아무리 봐도 우리 사는 모습이 참으로 이상하다.


집이 가까운 곳에 맘 통하는 친구가 있고 그리로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이 오고 가며 함께 놀고 어울리는 그런 어릴 적 친구를 만들 골목은 이젠 찾을 수 없는 것인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