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시아

내 마음의 방풍 지대

by 시우

투우장 한편에는 싸움을 하던 황소가 잠시 들어가 쉬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황소는 자신이 정한 그곳에 들어가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다시 기운을 차린 황소는 계속 싸움을 한다. 투우사는 황소가 정한 그 휴식처가 어디인지 알아야만 황소가 기운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황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한다. 인간에게 이 케렌시아는 바로 내면세계의 안식처이다. 아무리 격렬한 혼란의 상태, 격한 분노, 슬픔의 상태에 놓여있다고 해도 자신의 케렌시아를 찾으면 타인을 용서하고 또한 나도 용서해서 자기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기운을 얻는 것이다.


얼마 전 집의 지하실이 침수되면서 박스에 넣어 갈무리해뒀던 수십 권의 일기장이 유실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장생활을 거쳐 결혼,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기록해온 내 시간의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허탈함과 아쉬움에 앞서 그 글을 쓰는데 할애했던 내 시간의 총량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직장일, 집안일과 책 읽는 시간을 제외한 내 몫의 거의 모든 시간이 거기에 녹아있을 것이다. 나는 왜 글쓰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바쳤는가.

그것은 곧 '왜 나는 글을 쓰는가' 하는 물음에 맞닿아 있다.


시카고에 살았던 미국인 '비비안 마이어'.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입주 가정부, 보모, 간병인으로 생계를 꾸리며 평생 동안 사진을 찍었다. 40년간 13만 여 장. 그러나 생전에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사후에 우연히 그녀의 사진이 SNS에 발표되면서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세계 각처에서 그녀의 전시회가 열리고 전문가들보다 오히려 사진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는다.


비비안의 사진은 비범한 천재성이라기보다 그 꾸준한 기록성에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으로 지내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지만 결코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그녀가 남긴 사진은 세상을 향해 간절히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녀는 왜 그토록 사진 찍기에 몰두했을까? 발표도 못했던 사진들이 이런 극적인 기회를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면 그녀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현실 생활에서는 하층민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교류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내재된 지적 욕구.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는 렌즈를 통해 세상 보기. 그것은 외롭고 단절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닌 그녀의 케렌시아가 아니었을까?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 이 영화는 미국 뉴저지 주의 패터슨이라는 소도시에 거주하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아침에 차고지로 출근해서 온종일 버스 운전을 하고 퇴근. 퇴근 후 저녁 먹고 개와 산책하고 동네의 바에서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을 보낸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패터슨의 생활. 별다른 자극이나 재미도 없이 지루한 듯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르다. 게다가 그는 매일 시를 쓴다. 버스에 탄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 소소한 일상의 물건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시의 소재가 된다. 그런 매일매일이 반복되고 그런 평범한 일상이 쌓여 그의 시가 된다.

그러던 중 그동안 써온 비밀 시 노트를 잃고서 패터슨은 실의에 잠긴다. 마음을 추스르려 찾은 폭포 앞 벤치에서 만난 이국의 여행자. 그가 대화중 패터슨에게 묻는다. "시인이세요?" 패터슨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아니요. 나는 버스 운전사예요." 그런 그에게 여행자는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 고장의 위대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도 본업은 의사였지요."


비비안 마이어의 카메라나 페터슨의 시처럼 내게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자 내 안식처 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가끔씩 그랬듯이. 이번에는 좋은 글을 대할 때 생기는 압도적인 경이감과 부러움에서 비롯된 질투와 그로 인한 자기 검열에 걸린 탓이다. 물론 기성 작가들처럼 글로 밥을 버는 처지도 아니고 특별히 독자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그 질투라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단 한 두 줄, 때론 두어 개의 단어로 잡아내는 명징한 묘사, 절절하게 공감을 불러오고 빠져들게 만드는 표현의 힘, 그들의 반짝이는 글귀를 대할 때마다 새삼스레 기가 죽고 내 글이 너무 초라하고 밍밍하게 느껴졌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심경처럼.


시시콜콜한 일상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 그 생각과 느낌은 쉼 없이 생겨나고 변화하며 흘러가다가 곧 사라진다. 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직간접 경험, 느낌과 생각을 통해 글을 쓰고 나를 나답게 추스르며 살아간다.

어쨌거나 이제 난 다시 쓴다. 사실 작가, 시인, 그런 단어나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문학이든 아니든, 작가든 아니든, 그냥 나는 쓸 뿐이다. 비록 유명 작가도 아니고 글로 직업을 삼지도 않지만 글 쓰는 이 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그리고 나다워지기 위해서.


안네 프랑크가 자신의 일기장을 '키티'라 부르며 말을 건넸듯이 내게는 이 글쓰기가 가장 든든한 도반이자 안식처다. 그러므로 '글 쓰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물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경지라면 더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을 찍듯, 페터슨이 시를 쓰듯, 아무리 평범한 언어와 제한된 내 생각의 범주에서 나온 글일지라도 이것은 내 상처를 스치고 일상이 배인 나만의 세계다.


투우사에게 몇 개의 창을 박히고 칼로 찔려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곳에만 가면 숨을 가다듬고 다시 덤빌 기운을 차리는 곳. 유달리 허술한 외피를 지닌 나는 오늘도 내 케렌시아에 깃들어 숨을 고르고 상처를 핥으며 나를 내어 맡기고 있다. 내일, 여전히 허술하지만 그래도 밖의 세계를 향해 돌진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케렌시아”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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