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보배고둥
어려서 내 보물 상자는 엄마가 준 자그마한 오동나무 상자였다. 이 안에는 초등학생답게 잡다하고 쓸모없지만 내겐 소중했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 몇 가지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이것은 그중 하나였다. 어디서 얻은 것인지 혹은 주운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 이 녀석은 조개라고 하기엔 너무나 도톰했고 물을 떠났어도 다른 조개와 달리 아름다운 색감이랑 영롱한 윤기가 가시지 않아 아름다웠다. 어패류 같지만 흔한 바지락이나 꼬막처럼 뚜껑도 없고 소라처럼 속을 내보이는 입도 없어 그 정체가 신비로웠다.
상자 속의 가리비 역시 그 고운 산호 빛깔이나 형태, 무늬가 아름다워 나 홀로 진주조개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다. 왠지 그 녀석은 전에 안에다가 고운 진주를 품었을 것 같았다.
작은 소라는 가만히 귀에 대고 있으면 바닷소리가 들렸다. 귀에 소라를 대고 눈을 감으면 이내 너른 바다가 내 곁에 와 있었다.
그 이외에도 그 상자에는 작은 비단 조각, 색실, 구슬, 옛날 동전, 무늬가 예쁜 바지락 껍데기, 망가진 브로치...... 나를 충만하고 행복하게 만들던 보물이 들어 있었다,
혼자 놀다가 심심할 때 조심스레 꺼내보는 그 상자 속의 것들은 내가 보던 동화책과 더불어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나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곤 했다.
어려서 내 세계를 풍성하게 한 것은 단지 물건만은 아니었다.
장작불이 타오르던 아궁이 앞에 앉아서 망연히 바라보던 불꽃, 여름날 마당의 평상에 누워 바라보던 은하수나 별똥별, 온 밤을 가득 메우던 풀벌레 소리, 눈이 많이 온 날 다리 사이로 바라보던 눈을 이고 선 대밭, 추운 날 아침 긴 고드름 사이로 보이던 흰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했던가.
얼마 전 한 수필집을 읽다가 어려서 내가 아끼던 그 고운 조개의 이름일 것 같은 글을 보고 반가워 자료를 찾아봤다. 이제야 내 보물 상자 속에 있던 녀석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일명 타이거 조개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보배골뱅이라 하며, 복족류에 속한다. 딴 이름은 자패치(紫貝齒)다. 껍데기 높이 11cm, 나비 7cm이다. 껍데기 표면은 갈색·푸른색·흰색 등의 색층이 반복되어 나타나며 윤기가 흐른다. 무늬는 개체에 따라 크기와 밀도가 다르다. 조간대 부근의 암초에 서식한다. 바다에 사는 개오지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 색층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조각품이나 장식품을 만든다. 인도 태평양 수역에 분포한다. 인류 최초로 동아시아에서 화폐를 대신해 통용되었던 조개."
라고 소개된 이 조개의 이름을 내가 아는 데는 반백년이 걸렸다. 그 조개의 우리말 이름은 "별보배고둥"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외국의 여행지에서 이것에 줄을 매서 파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내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색감과 모양, 다른 크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던 적이 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거나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추측해본다.
내친김에 소라가 바닷소리를 내는 그 신비로운 이유도 새삼 찾아 읽어본다.
"모든 물체는 고유의 진동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바다, 섬 등 어디서도 마찬가지다. 보통 바다 가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 중 소라 껍데기의 진동수와 유사한 파장의 소리가 공명을 해 소리를 내게 된다. 바로 이 소리가 “쏴~” 하는 파도가 내는 소리와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면 특유의 파도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내겐 확 와 닿지 않는 이런 과학적 설명보다는 "소라는 바다가 그리워 소리를 품고 있다."라는 어려서 알던 이유가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바깥 외출이 뜸해져 심심해진 요즘 이것저것에 생각이 간다.
이젠 어른이 되어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없이 많은 것을 지녔지만 어려서의 그 작은 보물 상자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느끼던 충만함이나 행복감을 지금도 느끼며 사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도 곰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