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담은 지 45째 되는 날에 장을 가르려고 했다가 열흘쯤 늦춘 오늘 장을 갈랐다. 장 담은 지 45일에서 60일 정도 즈음에 장을 가르는데 일찍 가를 수록 된장이 더 맛있고 늦게 가를 수록 간장이 더 맛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는 된장이 더 중요하니까 일찍 장을 가르기로 했다.
전에 집에서 토마토 모종을 기를 때다. 남향의 베란다에서 자란 우리 집 토마토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부실한데 아파트 최상층이라서 하늘 아래서 직사광선을 받은 엄마 옥상의 토마토는 실한 열매를 맺었다. 그 이후 나는 햇볕의 힘을 거의 맹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베란다가 아닌 바로 그 엄마의 옥상에 항아리를 놓고 장을 담았다. 담아둔 장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자연의 조화를 기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소금물과 메주만을 넣었을 뿐인데 맑은 갈색의 간장이 우러나 있었다. 깊은 장맛은 아니고 아직 소금물의 훗 맛이 남아 있다.
딸을 조수로 대동하고 장 가르기에 들어갔다. 자그만 항아리를 소독해 준비하고 불은 메주를 조심스레 건져 잘 치댔다. 좀 질척하다 싶게 간장을 부어가며 치댄 된장을 담고 그 위로 메줏가루를 두툼하니 얹어 다독거리고 간수 뺀 소금을 두어 마무리했다. 면포로 입구를 봉하고 뚜껑을 덮어 마무리. 다른 항아리에는 맑게 거른 간장을 담았다. 간장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은 항아리 두 개가 옥상 위에 반짝이며 놓여있다. 어른들이 항아리를 보며 "참 예쁘다"라고 하실 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그 "예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세상에는 공짜가 참 많고 기적은 곳곳에서 늘 일어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햇빛, 공기, 뭐 그런 것 말고도 그저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기만 해 뒀는데도 맛있는 김치가 되어 익어가고 톡 쏘는 동치미가 되고 이처럼 구수한 된장이나 청국장도 된다. 이런 이 발효 과정도 그런 공짜 혜택 같아 황감하다.
손바닥만 한 화분에 흙과 작은 식물 하나를 심고 가끔씩 물을 주었을 뿐인데 쉼 없이 예쁜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는 화초를 보고 있으려면 노력한 것보다 너무 많은 보상을 얻는 것 같아서 미안할 지경이다.
그뿐인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낳아서 그저 밥만 먹이고 보살핀 것뿐인데 어느새 내가 생각지도 못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 자라는 것을 보면 그저 경이롭다. 청출어람이라는 말도 이런 놀라움과 감사함에서 비롯된 말일 것 같다.
코로나로 온 나라가 얼어붙어도 시간은 가고 봄은 오고 항아리의 장도 익어갈 것이다. 내가 담은 햇 된장의 맛은 어떨지 궁금하다. 엄마가 유난히 맛있는 장 항아리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담은 항아리가 그 항아리이길 빈다.
햇볕을 받으며 된장, 간장도 나날이 숙성되어가는데 나는 늘 그대로 뻣뻣한 날 것인 것만 같아 가끔은 내 나이가 부끄러움을 넘어 쑥스럽기까지 하다. 전에는 반백년만 살아도 사람이 현명해지고 깊어질 줄 알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