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전혀 뜻밖의 코로나 상황으로 일상이 변한 지 몇 달째다. 내 경우 주거 환경에 대한 성찰을 할 기회가 있었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삶의 방식에서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 궁금증을 기회로 호기심만 있었지 읽지 않았던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집어 들었다. 이 작품은 흔히들 알고 있는 무인도 생존기를 그린 다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패러디한 작품이다.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셸 투르니에"의 대표작으로 자연이 문화를 지배하고 원시성이 문명을 극복하는 새로운 신화라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실제로 로빈슨 크루소라는 소설은 4년 4개월을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 섬에서 혼자서 생활하다가 1711년 극적으로 구출된 셀커크라는 선원의 실화를 모티브로 해서 쓰인 소설이다. 다니엘 데포는 셀커크의 이야기를 28년 2개월을 대서양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서 난파되어 홀로 생활하다가 구출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로 만든다. 이 소설이 발표된 후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디포의 소설을 그대로 차용해서 로빈슨이 태평양의 스페란차 섬에서 지낸 것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패러디해서 발표한다.
다니엘 데포의 원작처럼 미셸 투르니에 작품의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도 원시의 섬에 난파된 후 생존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섬을 가꾸어간다. 고향에 두고 온 과거의 문명과 사회를 그리워하며 이 섬에 구현 해내 보려 노력한다. 본의 아니게 함께하게 된 원주민 방드르디를 길들이려 노력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그 섬에 파견된 대영제국 식민지의 총독처럼 여긴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불어)는 디포의 소설에서와 같이 길들여지는 만만한 원시인이 아니다. 오히려 로빈슨의 노력을 죄다 뒤엎고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되돌려놓는다. 다시 원시 상태로 환원된 로빈슨은 방드르디로부터 야성적인 삶의 방식을 배우고 즐기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대자연의 파장에 맞춰 동화된다. 작가는 인간이 이룩한 문화를 초월하여 완전성,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신화를 묘사하며 독자를 설득시키고 있다.
내게 절실하게 다가온 부분은 이미 3세기 전의 자연에 대한 서구 식민주의 문명의 태도(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18세기 당시 대영제국의 가치관이나 원시성이 문명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로빈슨이 느낀 고립감과 쓴다는 행위에 대한 그의 절절한 소감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간 이어져온 요즈음 생활에서 비롯된 탓일 것이다.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라고 그는 고립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 후 로빈슨은 무인도에서의 탈출에 실패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유아기로의 퇴행을 보이며 동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천연염료로 잉크를 만들어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자 이렇게 표현한다.
"종이 위에 첫 글자를 쓰게 되자 그는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글을 쓴다는 이 성스러운 행위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갑자기 지금까지 빠져 있었던 동물성의 심연으로부터 반쯤 헤어 나와 정신세계로 진입한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거의 매일 항해 일지를 펴고 그 속에 그의 물질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아니라 그의 내적 생활의 명상과 발전 나아가서는 그의 과거로부터 되살아나는 추억들이며 그곳에서 시작된 반성의 내용들을 적어놓았다. 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간이 많은 요즈음 난 오히려 다른 것에 마음을 쓰느라 읽고 쓰고 그리는 일과 떨어져 지냈다. 늘 되풀이되는 내 생활 패턴을 바꿔도 볼 겸 아무런 계획 없이 지냈다. 집을 치우고. 끼니에 신경을 쓰고. 요즘 발을 들여놓은 유튜브의 세계에 푹 빠져서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그리고 새롭게 열게 된 다른 창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본다. 나쁘지 않다.
전에 한 달에(어쩜 일 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접하며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것도 수많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지만 내겐 단식 같은 거였다. 몸을 정화시키기 위한 일정 기간의 일이지 늘 할 수는 없는.
어제는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전에 하다가 그만둔 일들을 들춰보고 정리했다. 그리고 펜을 잡아 일기를 몇 줄 쓰고 읽고 싶었던 책을 책상 위에 정리하고 도서관에서 빌릴 책 목록을 적어둔다.
트루니에의 로빈슨이 글을 쓰고 나서 느낀 비슷한 기분을 나도 느낀다. 사회와의 단절이 주는 고립감을 기술한 그의 생생한 묘사에 공감했듯이.
오월도 중순, 창밖에는 아카시아가 지고 있다. 초여름의 싱싱한 향기를 깊이 들이마셔본다. 납작했던 익숙한 공간이 다시 포슬포슬 부푸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