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의 추억
국민학교 다닐 때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삐라 주워보기였다. 난 어찌나 운이 없던지 학교 소풍 때 보물 찾기에서, 졸업 때까지 연필 한 자루도 못 타봤다. 아마도 그래서 남들 다 맞는 흔한 행운인 이 "삐라 줍기" 조차도 해보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 때는 월요일마다 운동장에서 줄 맞춰 서서 학교 조회를 했다.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근엄하신 교장 선생님의 눈치 없이 길고 긴 훈시가 있었다. 표창장이나 상장 전달식 같은 게 있기도 하고 주간 전달 사항 등등으로 이어지는 이 시간은 참 지루했다. 특히나 여름이면 더워서 지쳤고 겨울이면 꽁꽁 언 땅에 오래 서 있다 보면 발이 시렸다. 대부분의 애들이 검정 고무신에 나일론 양말을 신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어린것들을 그렇게 오래도록 땡볕 아래나 언 땅에 세워둘 수 있었을까 싶다.
내가 무슨 상장을 전교생 앞에 나가 받을 때는 무척 이 조회 시간이 두근거리며 기다려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가뭄에 콩 나듯 해서, 아침에 학교 스피커에서 경쾌한 행진곡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이 조회는 어린 마음에 하나도 달가울 것이 없었다. 자칫 몇 학년 몇 반 태도가 나쁘다고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께 지적이라도 당하는 날은 날벼락이 떨어지는 경우라 친구들끼리 소곤거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조회도 뜻밖의 즐거움이 찾아들 때가 간혹 있었으니 그것은 운 좋게도 삐라를 만날 때였다. 당시에는 부웅~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낮게 뜨는 거 자체도 대단한 볼거리였다. 근엄한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이어지는 운동장 조회 시간이라도 이럴 때는 아이들 고개가 저절로 위쪽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투척한 뭔가가 반짝이며 하늘 가득 떨어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게다가 그것이 바람을 타고 점점 우리 머리 위쪽으로 다가올라치면 교장 선생님의 "주목!" 따위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아이들의 주의는 온통 반짝이며 떨어지는 종이에 꽂혔다. 운동장으로 그것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줍기 위해 우르르 뛰는 통에 난리였다. 그럴 때는 아무리 근엄하신 선생님이라도 잠시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배부분 그것은 "삐라"라고 불리던 전단이었다. 대부분이 교과서 크기의 종이에 인쇄된 선전물이었다고 기억한다. 상업적 목적의 그 전단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며 대단한 홍보물이었을 것이다. 떨어진 삐라를 주워서 보면 갱지에 흑백으로 인쇄된 것일 뿐인데 그것이 하늘을 날 때는 어찌나 반짝이며 아름답던지, 가히 환상적이었다.
아이들은 삐라를 줍기 위해 우르르 몰리며 몸싸움도 불사했다. 난 선두는커녕 감히 그 그룹에도 끼지 못하고 있다가 남이 주운 것을 구경이나 할 뿐이었다. 나중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운 좋게 여러 장을 주운 아이도 있었고 그걸로 딱지를 접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종이가 아니라 반짝이며 하늘을 비상해 날아와 내 앞에 떨어지는 삐라에서 잠시 잠깐의 황홀함과 경이를 맛보는 것이 더 중했던 것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다가 얼핏 어렸을 적 삐라 생각이 난 적이 있다. 죄수들이 교도소 마당에서 작업 중에 스피커에서 울리던 뜻밖의 모차르트를 들을 때 그들이 짓던 표정과 상황이 얼핏 삐라를 발견했던 기억 속 아이들의 첫 반응과도 비슷해 보였다. 물론 우리는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서 적극적으로 "우와!~" 소리를 치며 달려갈 수 있었던 점이 다르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삐라 이야기가 요즘 뉴스에 오른다. 물론 삐라라는 말 대신 이젠 전단지라고 이젠 부르지만. (이번에 찾아보니 삐라는 전단지를 뜻하는 일본어였다. 영어 bill의 일본식 발음인 듯.)
저속하고 그 누구에게도 득 될 것 없는 대북 전단지가 도화선이 되어 온 나라가 남북으로 죄다 뒤숭숭하다. 코로나에 이어 엎친데 덮친 격이다. 그 지경이 되도록 손 놓고 있던 관계자도 무능해 보이고 큰 나라의 힘에 눌려 운신의 폭이 좁은 내 나라의 운명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건 그 과정이 어쨌건 모쪼록 이번 일을 발판 삼아 지혜롭게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빈다. 이번 전단 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평화 통일에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