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다식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소월의 시 "윤사월"에서 만난 송홧가루는 아련한 봄날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요즈음 도시에서 만나는 송홧가루는 영 그 느낌이 다르다.
아침에 나가보면 차가 늘 지저분해져 있다. 마치 매일매일 어디서 노란 분말을 일부러 도포라도 한듯해서 세차를 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또다시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노란 가루가 빗물 위로 띠를 이루어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집 앞에 산이 있다 보니 요즘에 날리는 송홧가루 때문이다. 다들 귀찮아하고 마치 황사보다 더 나쁜 알레르기 물질이라도 되는 양 싫어하지만 난 어려서 먹어본 다식이 생각나 단지 좀 귀찮지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어려서 할머니는 다식을 간식으로 주셨다. 온갖 재료를 꿀로 반죽해서 달콤하고 맛있었는데 그때도 귀한 다과였다. 맛도 좋지만 만드는 것도 재미있어 보여 다식을 할 때면 기다렸다가 곁에서 일삼아 구경을 하곤 했다. 특별한 날 어른들이 모여 다식 재료를 꿀로 반죽하고 기름칠한 다식판에 넣고 누르고 박아서 꺼내는 것이 보기와는 다르게 만만한 게 아니라서 늘 구경하는 거에 그쳤지만.
흑임자 깨로 만든 검은색 다식은 고소해서 좋았고 콩가루로 만든 노란 다식은 차져서 좋았고 녹말로 만든 흰 다식은 달보드레하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서 좋았다. 봄에 품을 들여 산에 가서 송순을 조심스레 털어오거나 따와서 만드는 송화다식은 병아리 솜털 색이라서 예쁘긴 했지만 어린 입맛엔 별로였다. 다식은 시간이 지나면 굳어버려 오래오래 며칠씩 아껴두고 먹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아침에 산에 갔다가 노랗게 분이 잔뜩 묻어있는 송순을 보면 예전 생각이 난다.
송홧가루에는 단백질과 무기질 비타민 C가 많은 영양의 보고라지만 요즘처럼 먹거리가 지천인데 누가 송화를 털어 수비를 하고 가루를 체에 치는 수고를 할 것인가. 그저 공중에 날려 차나 더럽히는 귀찮은 먼지 정도 취급이나 받지. 게다가 계절도 전과 달라 소월이 말하는 사월도 아닌 윤사월이면 5월을 훌쩍 넘긴 때라 송홧가루는 이미 다 날려가 구경도 힘든 때가 되었다.
애잔한 산지기네 눈먼 딸도, 꾀꼬리 울음도, 호젓하고 그리운 긴 봄날도, 할머니의 송화다식도 다 사라진 요즘인데도 가끔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 새삼 계절을 느끼게 해 준다.
오늘 밤에도 귀 기울이다 보면 멀리서 들리는 소쩍새인지 뻐꾸기인지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