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우리가 생각하는 흘러간 가요는 "울고 넘는 박달재"나 "두만강 푸른 물에..."로 시작하는 소위 뽕짝류의 노래였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미 인생의 절정기를 한참 지나 쇠락해가는 기성세대들이었다. 당시 우리는 이들의 취향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트윈폴리오나 양희은 이장희의 노래를 들으며 비틀즈, 아바, 싸이먼 앤 가펑클 등... 에 빠져 있었다.
얼마 전 모처럼 티브이를 돌리다가 보니 가요 무대에 해바라기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유심히 보니 해바라기뿐 아니라 당시 우리 시대의 애창곡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고령의 아나운서가 아직도 진행을 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으로 한참을 봤다.
'아, 애들이 보기에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가 이들에겐 우리가 느끼던 "두만강"이나 "홍콩 아가씨" 정서로 읽히기도 하겠구나.'
우리 세대가 현재의 눈으로 가늠되었다. 우리가 기성세대를 봤던 그런 눈으로 애들도 우리를 보겠구나 하는 자각이 새삼스레 훅 치고 들어왔다.
얼마 전 한 편의 영화 덕에 불붙었던 "퀸"의 현상에 한동안 기분이 좋고 괜히 가슴이 벅찼었다. 그 이유가 어쩌면 과거 우리 시대에서 소환된 노래가 지금도 공감된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드러내고 좋아하지 못하다가 "퀸"현상을 빌미 삼아 그때 그 시절 노래를 맘껏 드러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또 내 아이들에게 우리 시절의 "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을 공간이 자연스레 주어진 점, 노래를 통해 여전히 공감될 감성의 여지를 지금 애들과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본 것 등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낡고 퀴퀴한 것은 아니야. 단지 시대가 흘렀다고 다 뭉뚱그려 아저씨 아줌마로 통일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라는 말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씨가 여주조연상을 받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가 고령의 나이임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싱싱한 위트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데다 솔직하고 삶과 말이 일치하는 그의 생활이 뒷받침되어서다. 그것은 세대를 불문하고 충분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이란 숫자와도 분명 연관이 있지만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실지 예를 보여주는 것 같아 내게는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나이 듦이란 누추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시대에 나도 저 나이 들어 저 정도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한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 나이 듦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바라기로는 적당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노쇠하지 않고 살다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좋겠지만 자연의 이치가 어디 그러한가. 수시로 마주하는 건망증과 때때로 보수를 해줘야 제 기능을 하는 몸이지만 대신 이 나이 되어 누리는 안정감과 더불어 어차피 이 또한 사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지낼만하다. 더 이상 허명에 끄달릴 일도 없고 바깥의 시선에 움츠러들 일도 덜하다. 좀 더 편하게 체념도 하고 또 그만큼 자신에 솔직해진다. 이젠 뭘 배우는 것도 온전히 정말 좋아서, 배우는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내 입맛에 맞는 거를 찾아서 몰입할 수 있는 여유가 나이 듦에 대한 보상 같다. 책을 읽을 때도 시력은 저하되었지만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또 나이 들며 감사한 것들이 많아졌다. 세상에 당연하고 우연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 서다. 또 나 자신과 타인의 실수에 좀 더 너그러워진 것은 시간과 경험이 주는 선물 중 하나다.
물론 난 지금도 모든 면에서 노련함이나 원숙함과는 거리가 삼천리지만 내가 처음 살아보는 이 시간을 내 식으로 찬찬히 음미해 볼 생각이다. 때론 전과는 다른 정신이나 몸의 기능 때문에 피곤하고 힘들겠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의 문이 열린다는 말에 희망을 가진다. 물론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서 적응하기가 마냥 좋거나 쉽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20대. 30대, 40대...모든 연령대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