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도 유행이 있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를 가 보면 전에 비해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건축 자재가 전과 다르게 고급스럽다는 것, 층간 소음이 덜 난다는 것, 단열이 잘 된다는 것, 주차 공간이 지하에 넉넉하게 확보가 되어 있다는 것 등등 이외에 대부분이 앞면 베란다가 생략되어 있고 전면의 너른 통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젠 이삿짐도 이 통창이 없으니 전부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단다.
얼마 전 지인의 새 아파트를 보고 오면서 이상하게도 모든 게 다 좋은데 왠지 갑갑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고급 오피스텔이나 회사 사무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도 트여있고 조망권이나 일조권도 괜찮은데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봤다. 너른 통창이 사라진 자리에 조각난 창문이 있고 곧바로 밖과 이어져서가 아닐까, 즉 베란다가 없어서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모아졌다.
우리 집 같은 구형 아파트는 앞 뒷면에 죄다 베란다가 있어 대부분의 방과 밖을 완충해 주는 기능을 한다. 잘 안 쓰는 물건을 두기도 하고 빨래를 너는 공간으로 쓰기도 하고 화분을 두어 미니 화단으로 가꾸기도 하는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를 나중에야 깨달았다. 우리 집 안방의 베란다 확장을 하고 나서야 말이다.
일단 베란다 공간을 방으로 편입 시키니 공간이 그만큼 넓어져서 좋고 곧바로 앞의 산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도 눈을 뜨면 바로 채 깨이지 않은 새벽하늘과 산 능선이 눈에 들어 좋았다. 그러나 대신 밖과 나의 완충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전 같으면 여름에 밖에 나갈 때 집의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고 다녀도 좋았다. 비가 와도 밖의 베란다 창과 안쪽의 창을 다 열어두고 나름의 운치를 즐겨도 좋았다. 홈통의 물소리를 듣는 운치도 있고 가끔씩 베란다 창으로 들이치는 빗줄기를 보기도 하고 뒤늦게 나가서 창문을 닫으며 온전히 밖과 단절되는 그 안온한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베란다가 없어지고 나서는 외출 때 늘 창문을 닫고 다녀야 되었고 비 오는 날이면 문을 꼭 닫고 있어야 했다. 그저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구경하는 수밖에. 자연스레 이어지던 밖의 세상과 내 공간이 단절되었다. 난 풍경의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이 되어갔다.
주위의 말을 들어보니 베란다가 사리지고 난 후 집안에 빨래 건조기가 들어왔다고들 한다. 자연의 힘에 맡겼던 빨래 건조 대신 들어선 기기. 완충지대와 함께 사라진 무엇인가의 자리에 대신 들어설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무엇. 완충 역할을 맡았던 별 볼일 없어 보이던 것 대신에 다른 무엇인가가 차츰 늘어갈 것이다.
인간의 결핍감은 무엇으로든지 보상을 요구한다. 육체노동과 어둠이 사라진 문명 세계에 들어선 불면증에 수면제가, 이웃과 친구가 사라진 현대인의 외로움에는 전자기기가 대신 들어서듯이.
너와 나, 너희와 우리,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어디 그리 칼로 끊듯 분명하던가. 내가 서는 위치에 따라 동산의 아침 해는 오른 편에서 뜨기도 하고 왼편에서 뜨기도 한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에 존재하는 완충지대는 그런 모순의 날을 무디고 온순하게 만든다. 격한 대립, 이질적 환경에 숨 쉴 공간을 주고 서로 역지사지해서 호아지게 여유를 주는 공간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별 볼일 없을 거 같던 바다와 땅의 완충지대였던 갯벌이 사라지고 나서야 오염된 바다의 정화 기능이 사라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것을 깨닫듯이. 효율성이나 경제성에 매몰되어 완충지대의 소중함을 모르고 없애버린 후에 남는 것은 콩팥이 사라진 인간처럼 정화되지 못해 생기는 병이나 불편함이다.
좀 어수룩하고 경제성도 없는 것 같고 별로 빛나지도 않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양편이 함께 순화되는 존재 그런 완충지대가 갈수록 더욱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빛나지 않음으로 인해 더 빛나는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