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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19. 2021

닭백숙과 석유풍로


처음 석유풍로가 나왔을 때 아마도 부엌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커다란 가마솥에 나무로 불을 지펴야만 뭔가 요리를 할 수 있었던 철기시대나 다름없던 시대를 지나 석유를 호롱불 같은 조명을 위한 연료가 아니라 조리를 위한 연료로 대체해서 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 조리 및 난방을 위해서 연탄을 쓰던 것 역시 대단한 변혁이었다면 그에 한 발짝 더 나아가 피우기 쉽고 이동 및, 화력 조절이 용이한 이 석유풍로야말로 획기적인 제품이었을 것이다.     


전에 자취할 때를 생각해봐도 집을 비우면 연탄불이 꺼져서 방은 냉골일지라도, 밥은 지어먹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석유풍로 덕이었다. 그을음도 나고 불완전 연소가 되기 일쑤라서 냄새도 좀 나고 심지가 닳으면 갈아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 정도야 감내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이후 난방 역시나 석유나 가스로 해서 집 안에서 냉, 온수가 함께 나올 수 있는 신천지가 열렸다. 그 후로는 취사도 집 안에서 가스를 이용해서 냄새 걱정 없이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아파트라는 주거 혁명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불과 십여 년 사이의 변화다. 물론 지금이야 가스도 일산화탄소 걱정으로 전기레인지로 바뀌는 추세라고 하지만.     


간단한 하나의 물건이 우리 삶의 틀을 바꾸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우스운 이야기로 비아그라의 발명이 바다 물개의 개체 수를 늘리는데 기여함과 동시에 한의원의 보약 매출을 감소시켰다는 것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찾아보면 어찌 석유풍로나 비아그라 뿐이겠는가. 사소한 듯 보이는 하나의 만남이나 사건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오래전 이야기다. 전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렸던 아이들이랑 산골 친척 아저씨 댁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집은 그때까지도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있었다. 물론 가스레인지도 있긴 했지만 부엌 구석에는 석유풍로도 있었다. 집안 난방을 불을 때서 하다 보니 그 불을 놀리지 않고 밥이나 국 정도는 끓였던 것 같다. 그 의문의 석유풍로는 가스통 배달이 잘 안 되는 지역이라 급할 때를 대비해 없애지 않고 가끔 쓴다는 거였다. 

오후가 한참 지나 일어나 나오려니 자꾸 친척 아저씨는 모처럼 왔는데 그냥 가면 안 된다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극구 말렸다. 비포장 길로 갈 길이 머니 내키지 않았고 아이들이 모기에 물리는 것이 걸렸지만 시부모님이 그러자 하셔서 저녁을 먹고 나오기로 했다. 한동안 마당에서 온 집안 식구가 다 달려들어 요란한 실랑이 끝에 실한 암탉 잡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날쌔고 사나운지 닭이 사람을 잡게 생겼었다. 한데 그 후로 날은 컴컴해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저녁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서 부엌에 들어가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숙모 혼자서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그 물로 닭을 튀겨 털을 뽑고 내장 손질을 하고 다시 그 닭을 넣어 불을 피워 푹푹 끓이자니 세월아 네월아가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저렇게 사는 주부가 있구나 싶게, 나이도 별로 들지 않았는데 내 보기에는 사는 모습이 마치 조선조 여인네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 아저씨는 백구두에 검은 선글라스 끼고 읍내로 마실 다니시는 멋쟁이라는데. 그날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전깃불도 희미한 마루에서 모기에 뜯겨가며 먹었던 닭백숙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맛보다는 마치 시대를 거슬러 조선시대 농가에서 먹었던 저녁밥 같아서 지금도 마치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송할 정도다.     


한데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이 뜨거울 것인데 어떻게 여름밤에 잠을 자나 오면서도 궁금했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서 여름에도 밤에는 추워서 그러는 건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단지 그때 먹었던 닭이 낮에 아저씨네 마당에서 같이 놀던 그 닭인지 아이들이 물어볼까봐 조마조마했던 기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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