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
어렸을 적 엄마 따라 시내 구경을 가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 서던 곳이 바로 극장 앞이었다. 전주에 몇 개 있던 극장 위에는 대형 간판이 영화가 바뀔 때마다 갈렸는데 어쩜 그리도 영화배우와 꼭 같은 모습의 간판을 걸어두었던지 늘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신성일, 문희, 고은아, 허장강 같은 배우가 거기에 있었다.
중학교 때는 남부시장 종점 버스터미널에서 늘 통학 버스를 탔기 때문에 남부시장에 있던 극장의 간판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실사 출력해서 걸면 되는 모든 그림을 그때는 붓으로 직접 그렸다. 난 어떤 전문 화가가 있나 보다 싶어 내심 존경스러웠다. 중앙극장, 시민극장, 삼남 극장, 코리아극장, 제일 극장, 이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극장인데 도대체 저런 작품을 누가 그리나 싶었다. 어쩌다 가본 서울과 대전의 극장 간판 그림이 내가 봤던 전주의 삼남 극장 간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실물과 닮지도 않고 구성도 어설퍼서 속으로 엄청 무시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가진 전주에 대한 자부심 중에는 이 '극장 간판'의 품위도 한몫을 했다. 저런 간판을 그려내는 사람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예술가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아 극장 건물 옆 골목처럼 기다란 좁은 공간의 철문이 열려있어서 우연히 엿보게 된 그 안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아마도 그곳은 영화 간판을 보관하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는 빈 터이자 작업 공간이었나 보다. 그리다 만 영화 간판이 보였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땟국이 절고 물감이 묻은 후줄근한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 몇 이서 앉아 물을 마시며 쉬고 있었다. 몹시 지쳐 보였다. 그 옆에는 각각의 '뺑끼통'이 색깔별로 놓여 있었고 붓도 여러 개 있는 걸로 봐서 영화 간판을 그리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는 캔버스는 지난 영화의 간판에 대충 흰 밑 칠을 한 것이었다. 그 멋진 영화 간판은 일회용이었던 것이다. 묵은 간판 위에 다시 다음 영화 포스터를 그려 옮겨 놓을 뿐 그 어떤 예술성이나 작품성과는 거리가 먼 일회성 소모품일 뿐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아니라 작업자라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별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영화관 귀퉁이 후진 공간에서 막노동에 가까운 색칠을 하는 그냥 삼류 업자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다니.
몇 년 전 "마지막 간판장이"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1년에 간판 일을 시작해서 2003년까지 광주극장의 마지막 미술부 직원으로 남아있던 박태규 씨가 마지막 손 간판 전시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간판을 수작업으로 그려 넣어 걸었던 시절, 영화 역시 지금처럼 수시로 소모하는 오락 제품이 아니었다. 한 편의 영화는 귀하고 귀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우려먹고 이야기하고 뇌리에 새겨지는 '작품'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때 그 시절, 내가 겪은 어렸을 적의 일이 대부분 "그때를 아십니까?" 수준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보니 내가 나이 들었다는 이야기고 우리의 시대가 이제 자리를 내주고 물러서는 중이라는 이야기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또 그 세대에 맞는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장식하고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게 연민과 더불어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