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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11. 2021

연필

동아 향나무 연필, 낙타표 문화연필, 톰보 4B 연필.... 필통에 연필을 잘 깎아서 조르륵 넣으면서 느끼던 그 뿌듯한 기분을 잊은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가끔씩 볕 드는 날 베란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한가하니 연필을 깎는다. 물론 몸도 맘도 한가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작지만 그래도 칼을 다루는 작업이라서인지 아니면 죽죽 깎여나가는 나무 때문인지 맘이 차분해지고 금세 몰입이 된다. '연필깎이 참선'쯤 되는 것 같다. 전에 우리 아이들 어렸을 적에 필체 나빠진다고 샤프펜을 못쓰게 하고 연필을 깎아주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엄마가 연필 깎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딱 붙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훌쩍 커서, 지금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헤밍웨이가 늘 몰스킨 노트와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연필깎이를 휴대하고 다니며 글을 썼다고 하던가. 관록 있는 작가가 느긋하니 카페에 앉아 연필과 공책을 꺼내 글을 쓰는 모습이 그림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난 지금도 연필을 좋아하지만 수술 후 손가락이 불편해진 후부터는 거의 쥐어본 적이 없다. 혹시 연필을 쓸 일이 있으면 두툼한 심의 2B샤프를 쓰는 정도. 4B 흑연심이 삭~삭~ 종이 위를 스치는 그 촉감이 손에 느껴지는 것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스케치도 하지 않으니 그런 것은 호사스러웠던 옛이야기가 되고 만 셈이다.     


우리 초등학교 적에는 연필 한 다스가 얼마나 뿌듯하고 대단한 상이 었는지 모른다.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해도, 우등상을 타도 공책이나 연필 한 다스가 전부였다. 내 서랍에 연필 두어 다스가 있으면 어찌나 든든하던지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었고 지금도 역시 내 서랍에 그득한 문구를 보면 흐뭇하기 그지없다. 지금 아이들이야 연필뿐 아니라 모든 문방구가 필수품이 아니라 팬시상품쯤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 때는 몽당연필 하나를 잃어버려도 책상 속을 뒤지고 교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찾았다.     

전에 인도나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 차만 서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손을 내밀었다. 이런 곳을 많이 다녀보신 우리 일행의 어느 선생님이 연필을 한 자루씩 나눠주시는 것을 봤다.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에 갈 때는 서랍을 뒤져서 연필, 볼펜을 모아 가져 갔다. 한데 내 주변머리로는 그것도 다 나눠주지 못하고 몇 자루를 도로 들고 와서는 내 변변찮음을 스스로를 한심해한 적이 있다.   

   

제트 스트리밍처럼 매끈하니 술술 써지는 요즘의 필기도구보다 약간 까슬까슬한 질감의 것이 난 더 좋다. 만년필, 연필, 수성 잉크펜처럼. 사람 관계도 그저 미끈미끈한, 절대 손해 볼 일 없고 쿨하다는 인위적 관계보다는 속내 한 자락 꺼내놓고 흉허물 없이 만나는 관계가 더 편하고 좋다. 난 천상 효율로 따지자면 이제는 별 볼일 없는 연필 같은 구시대 사람인가 보다. 그래도 난 그런 것이 더없이 좋고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과 사귀고 싶다.     

지금도 다시 찾고 싶은 감성의 하나가 공책과 필기구를 앞에 하고 책상에 오롯이 앉았을 때 차오르던 그 충만함 같은 것이다. 그런 맘을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그저 한가한 시간과 맘의 여유, 한 조각 햇살, 조용한 내 공간만으로도 그런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앞으로는 무한하고 공짜이면서 진짜 여유 있는 즐거움을 찾아볼 생각이다. 필기구를 마주하고 앉았을 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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