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기(달고나)의 추억
요즘 앞의 시장에는 매실이 끝물이다. 초록색 그물망에 10Kg 단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매실이 이제 다 팔려서 보이지 않는다. 마트마다 앞에 내놓고 팔던 커다란 몸체에 빨간 뚜껑을 한 유리나 플라스틱 용기도 이제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갈색 포대에 든 백설탕도 역시나 마찬가지. 요즘 한창 만드는 효소 과일청 식초 등속의 것들도 바로 이 설탕이 없으면 죄다 허사다. 설탕을 생각할 때마다 "참 예전에 비해 우리가 풍족하게 사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도 웃는다. "하고 많은 것 죄다 놔두고 하필이면 싼 설탕에서 풍족함을 느끼다니" 싶어서다.
예전에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 시험문제에도 나왔던 이것. "몹시 피곤할 때 피로를 푸는 방법은?" 정답 중에 하나가 바로 "설탕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었다. 당분 과다로 인한 폐해 때문에 설탕 덜 먹기 운동을 하는 이 시대에 지금 초등학교에서 이런 것을 가르친다면 웃음거리 이전에 개그의 소재로 등장할 일이다. 하기야 50년 전의 일이니 그 사이 강산이 다섯 번은 변했을 것이다.
꿀이나 조청, 설탕 같은 것은 귀한 단맛이었고 당원, 사카린이 일상에서 단맛을 내는데 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옥수수를 찌거나 감자를 삶을 때, 술빵이나 찐빵을 찔 때, 그 이외에도 모든 단맛을 낼 때는 귀하고 비싼 설탕 대신에 당원이나 사카린을 썼다. 동네 가게에 심부름 가면 종이판에서 하나씩 떼어주던 조잡한 비닐봉지에 든 결정체의 가루를 사들고 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름에 미숫가루를 타 먹을 때는 이 단맛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설탕을 넣었을 때의 그 깔끔한 단맛과 당원이나 사카린을 넣었을 때의 그 텁텁한 단맛에 이어지는 쓴 뒷맛의 차이. 그래서 미숫가루를 타 먹을 때는 당원이나 사카린이 아닌 이 설탕이나 꿀을 아껴가며 타 먹었다. 한마디로 설탕은 귀한 식재료였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은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이나 당뇨 환자의 설탕 대용으로 몸에 흡수되지 않고 배설되며 전혀 열량이 없는 사카린을 사용한다니 격세지감이 있다.
초등학교 적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오시면서 선물로 예쁜 포장의 꾸러미를 가지고 오셨다. 포장에 귀하게 보이는 손잡이까지 있는 것이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풀어 봤다. 그 안에는 커다란 적갈색 원형 철제 상자가 귀물스레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상자 뚜껑에는 크림색 칼라꽃이 그려져 있었다.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상자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흰 설탕이 들어있었다. 아마 당시로는 고급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설탕을 어찌 먹었는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지만 그 상자는 오래도록, 얼마 전 까지도 색실 보관함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 상자 위의 칼라꽃을 그대로 그려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나는 설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 아름다운 상자다. 요즘은 수입 과자점이 곳곳에 생기고 그런 과자 중에는 비스킷을 그런 둥근 통에 넣은 것들도 많이 본다. 그러나 내가 가졌던 그런 아름다운 설탕 상자는 아직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이 설탕과 더불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학교 앞 '띠기'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단어 '띠기'가 오가는 학교 문전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등하교생들을 설레게 했던가. 작은 궤짝 위에 반질거리는 스텐 판이 붙어 있고 옆의 연탄 풍로 위에는 하도 오래 써서 밖이 까맣게 변한 작은 국자형의 오목한 그릇이 있다. 교문 옆 길목 명당자리에 자리 잡은 아저씨는 설탕을 한 수저 그 오목한 그릇에 넣고 은근히 불 위에서 녹인다. 그다음 젓가락으로 소다를 조금 찍어서 그 녹은 설탕에 넣고 저어주면 갈색으로 변하며 희게 부풀어 오르는데 그때 나던 그 싸아하면서도 고소한 냄새라니. 그 부풀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상자 위의 금속판에 탁 부어서 누름쇠를 대고 눌러 평평히 한 다음 내가 고른 모양 틀을 얹어 살짝 눌러준다. 어찌나 야박하니 슬쩍만 눌러 주던지 늘 아쉬웠다. 이윽고 다 굳어진 후에 쓱 떼어주는데 그 틀에 맞춰 잘 자르면 원 플러스 원으로 하나를 더 해줬다. 그러나 아무리 침을 발라 살살 녹이고 갖은 수를 써도 그런 덤을 받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 모양이 깨져버린 달콤 쌉쌀한 띠기를 아쉬운 마음에 녹여 먹으며 다시 한번을 시도하기도 하고.
사실 나는 간도 작고 지나친 모범생이라 주로 구경을 하는 축에 들었지만 실제 하거나 구경을 하거나 그 재미야 매한가지였다. 간을 졸이며 띠기를 하고난 후, 사건은 늘 그다음에 생겼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집에 가서 실습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있다. 엄마가 외출해서 부엌이 빈 틈을 타 집의 국자나 놋수저에 흰 설탕을 한 수저 넣고 연탄불에 녹인 다음 소다로 부풀게 하는데 까지 성공이다. 내 마음까지도 띠기 반죽처럼 부풀어 올라 신나지만 실컷 놀고 난 그다음이 문제였다. 한번 검게 타서 눌어붙은 그 설탕 소다는 좀체 닦아지지가 않았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없던 일로 해놓아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수세미로 자꾸 문지르다 보면 수저에 구멍이 났다. 그때의 그 난감함이라니.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모든 가정에서 그 구멍 난 수저나 국자 때문에 등짝을 두들겨 맞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별것 아닌 이런 추억을 함께 나누는 사이, 그런 것을 같은 추억 문화권이라고 말을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 전에 여행을 갔을 때다. 아주 까다롭게 생긴 멋쟁이 여자분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띠기 추억을 공유하면서 정서적으로 엄청 가깝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물건은 귀한 것 없이 흔전 만전 한 요즈음, 예전에 귀했던 것은 아주 흔해졌지만, 예전에는 흔했어도 지금은 돈으로도 못 사는 다른 소중한 것들을 함께 떠올려보면 은은하니 가슴이 따듯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