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과 호박죽
병실 밖은 한여름이다. 전에 없던 폭염과 비 그리고 정치적 이슈로 한껏 달아올라있다. 열과 두통, 그리고 병원 밥에 힘들어하며 지내는데 이상하게 수박이 그리도 먹고 싶었다. 저 안에서부터 밭은 듯 버석거리는 극심한 갈증이 마치 수박의 그 달고 풍부한 과즙으로 채워질 것 같은 간절함. 달고 시원한 그 붉은 속살을 실컷 먹으면 원이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한데 어디서 수박을 먹는단 말인가. 면회도 제한되고 어디서 뭐 시킬 곳도 없는데. 그러던 차에 동생이 걱정으로 전화하며 뭐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수박이 먹고 싶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날 오후 늦게, 외래 환자도 다 끊긴 시각. 서울 사는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왔는데 면회는 안 된다지만 이모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궁리 끝에 늦은 시간에만 갈 수 있는 지하 편의점이 생각났다.
수액을 매달고 덜덜덜 수액 거치대를 끌고 그곳에 내려가 만난 조카는 주섬주섬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낸다. 따끈한 호박죽 그리고 3단 찬통에 가득 붉은 수박을 얌전하게 깍둑 썰어 넣어왔다. 지난번 결혼식도 못 가보았던 조카다. 186cm의 큰 등치가 어디 편의점 한 구석에도 있을 곳이 없어 쇼핑백만 받고 곧바로 헤어졌다. 이모 수박 드시고 싶다고 동생이 귀띔했으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자신의 집에서 왕복 2시간 거리를 이 이모를 위해 수박을 들고 찾아와 준 조카가 참 고마웠다.
병실로 돌아와 그 자리에서 한 팩의 수박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몸 안의 세포가 모두 해갈되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달고 시원한 수박을 언제 먹었던가. 뻑뻑했던 입이 촉촉해지고 눈이 훤해지는 거 같다. 저녁으로는 조카에게 받은 호박죽을 남김없이 먹었다. 외부 음식 유입을 엄히 금하고 있으나 막 끓인 뜨거운 호박죽을 감염 두려움 없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입원 15일째
새벽에 열이 날 시간을 건너뛰었다. 아침까지도 열이 없다. 열도 사그라든듯하고 패혈증도 아니라면 이제 퇴원할 때가 된 거 아닐까? 아침 회진 때 열도 더 이상 안 나고 혈액검사 수치도 안정적이니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드디어 퇴원이다. 이제 2주 차 접어든 지도 며칠 지났으니 서서히 면역력도 올라올 시기다. 안심하고 퇴원해도 되겠다. 딱 보름만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항암이 남았다. 딱 한 번!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휘청거리는 다리로 기차역을 향한다. 그동안 예악과 취소를 반복했다. 지방에서 온 환자들은 차편을 챙기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두어 시간 간격의 기차표 중에 내려갈 열차를 시간 맞춰 예약하는 일이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차창 밖은 한 여름. 그러나 단 한 번도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내내 병실에서 그리고 방에서만 지내서인지 아니면 내 몸이 더위를 느낄 여유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큰 가방을 들고 기차역 플랫폼에 내렸을 때 남편이 마중 나와 있다. 타임슬립을 해서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눈물 나게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