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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Jun 28. 2019

좋은 서부극, 나쁜 서부극, 이상한 서부극.

21세기 웨스턴으로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서부극은 끝나 버렸나


서부극은 영화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르다. 1903년 <대열차 강도>로 시작되었던 서부극은 이내 20세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셰인>의 앨런 래드처럼 잘 생기고 매끈한 카우보이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악당들은 쓰러졌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서부극의 영웅적 마초주의는 곧 20세기 미국의 정신이 되었다.



아무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부적 영웅주의에 제동을 건 것은 이탈리아의 서부극이었다. 이탈리아의 서부극에는 영웅도 정의도 없었다.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악당을 쏘는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것은 기존 서부극이 영웅성으로 포장해 오던 마초주의의 민낯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서부극은 계속해서 마초적이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서부극은 마초주의를 벗어나려 시도했다. <늑대와 춤을>의 케빈 코스트너가 적대하는 것은 오히려 백인들이다. 지금껏 영웅으로 숭상되어 오던 '마초'라는 것이 실은 이리도 잔인하고 악랄한 것이었음을 영화는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나 서부극과 마초주의의 분리는 되려 서부극의 몰락을 낳고 말았다. <늑대와 춤을>은 1991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위대한 마침표가 되고 만다.



이처럼 서부극은 마초주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반(反)마초주의 서부극은 있을 수 있어도, 마초주의와 아주 무관한 비(非)마초주의 서부극은 없었다.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마초주의는 언제나 서부극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마초주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는 서부극도 통하지 않는다. 서부극의 몰락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럼 서부극은 정말 끝나버린 걸까. 이제 스크린에서 황량한 사막과 번득이는 총구를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서부극을 <스타워즈>, <그랜 토리노>, <로건> 같은 다른 장르의 기호로만 추억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다른 정신의 서부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른 정신의 서부란, 다른 땅─이를테면 만주─에서 가능한 게 아닐까?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대한 이야기다.




'이상한 놈'의 서부극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제목까지 비슷할 정도로 <석양의 무법자>(원제 :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영향을 가득 받은 작품이다. 잘생기고 나름의 대의명분까지 갖춘 '좋은 놈',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악당 '나쁜 놈', 왠지 짠하고 웃기게 생긴 '이상한 놈'이 나오는 건 물론이고, 보물을 두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바뀌는 모습까지 똑같다. 이들이 벌이는 1:1:1 결투 장면은 아예 시퀀스 자체가 오마주일 정도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석양의 무법자>의 메인 주인공은 '좋은 놈'인 반면 <놈놈놈>의 메인 주인공은 '이상한 놈'이다. 인물의 배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상한 놈'이고, 보물을 찾은 뒤에 무엇을 할 건지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한 놈'이다. 과거 행적이 밝혀지는 것도 '이상한 놈'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이상한 놈'이다. 결투가 끝난 뒤 '좋은 놈'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쁜 놈'은 죽었다. 끝까지 확실하게 살아남은 '이상한 놈'이 오토바이를 타고 황야를 달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다른 서부'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놈놈놈>에서 기존 미국 서부극의 영웅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박도원(정우성)'이다. 그는 잘생겼고, 까리하고, 멋있는 건 혼자 다 하고, 독립군을 돕는다는 나름의 명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의 외모는 멋있고 액션은 빛나지만, 서사는 어딘가 빈약하고 캐릭터는 뭔가 심심하다.


그러나 '윤태구(송강호)'는 어떤가. 펄럭이는 코트와 중절모 대신 깔깔 방한복과 군밤장수 같은 모자를 쓰고, 와이어를 타고 날아다니긴커녕 총알을 막기 위해 잠수부의 금속 헬멧을 뒤집어쓴다. 카리스마는 정우성과 이병헌한테 전부 몰아주고, 시도 때도 없이 웃긴 대사와 짠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게 그의 모습이다.



이런 인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굵직굵직한 씬이 아니라 소소한 디테일에서 나온다. 그는 총격전이 벌어지자 제일 먼저 자신이 모시는 '할매'를 안전하게 챙긴다. 그뿐인가. 제멋대로 보물지도에 손을 댄 친구 '만길'이 위기에 처하자 그 누구보다 끔찍이 챙기는 것도 그다. 아편굴의 함정에 빠진 그가 감금된 아이들과 탈출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는 '다른 서부'의 '다른 영웅'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존 서부극의 총잡이들이 악당을 '제거'함으로써 영웅이 되었다면, 그는 주변인을 '챙김'으로써 영웅이 된다. 악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즉, 기존 서부극의 총잡이들은 악당은 물론 악당에게 고통받던 마을 사람들보다도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비록 그가 석양과 함께 떠나게 되더라도) 사실상 '1인자'로서 마을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다. <셰인>의 셰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윤태구(송강호)는 주변인을 챙긴다. 즉, 주변인이 없으면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시종일관 웃긴 윤태구의 대사와 행동은 그가 가진 결함을 부각시킨다. 이로써 그는 주변인과 유리된 '1인자'가 아닌 주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동급'의 존재가 된다.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독고다이로 활동하는 박도원(정우성), 악마적 카리스마로 1인자가 되어 타인 위에 군림하는 박창이(이병헌)와 달리, 윤태구(송강호)는 '동급'의 존재로서 타인과 교류하며 그들을 '챙김'으로써 영웅이 된다.



물론 윤태구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상이 아니다. 그는 한국적 민중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시민형 캐릭터'다. 다른 영화에 자주 나오는, '뭔가 웃기고 짠하고 구질구질한데 어쩐지 미워할 수는 없는 아저씨'가 그의 기원이다. <놈놈놈>이 성공한 점이 있다면, 첫째는 그를 섣불리 비극적인(그래서 결국 어거지 신파로 끝맺게 되는)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끝까지 희극적인 인물로 밀고 나갔다는 점이다.


둘째는 무엇이냐고? 당연히 그걸 서부극에 써먹었다는 점이다. 서부극의 기호를 다른 장르에 접목시켜 왔던 주류적 흐름과 반대로, 김지운 감독은 다른 장르에서 발생한 기호들을 서부극에 접목시켜 '좋은 서부극'도 '나쁜 서부극'도 아닌 '이상한 서부극'을 만들어 냈다. 여전히 마초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고 있긴 하나, 그러면서도 무언가 비(非)마초주의적이려고 하는 그런 이상한 서부극 말이다. 이로써 서부극은 21세기에도 다시금 생기를 얻게 된다. 번득이는 총구, 흩날리는 먼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상한 서부극'이 21세기 서부극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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