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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ug 30. 2019

순수 같은 소리 하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지루해 보이는 세계문학전집 사이에서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과연 아무런 호기심도 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비록 이 낭만적인 제목이 전작 『인간의 굴레에서』에 관한 논평에서 빌려 온 것이라고는 하나, 서머싯 몸은 작품의 제목을 짓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 아래에서부터 당신은 장미 향기를 맡을 것이다』의 밀란 쿤데라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동시에 서머싯 몸은 '글을 재밌게 쓰는 재주'도 상당히 뛰어났던 걸로 보인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타히티를 오가며 펼쳐지는 풍경은 활자에 총천연색을 발라둔 듯 선명하다. 이토록 수려한 묘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자면, 한쪽에서는 폴 고갱을 모델로 삼았다는 기이한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악마적인 광기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의 주변을 따라다니는 온갖 소문과 사건을 쫓아다니며, '나'와 우리는 점점 퇴폐와 낭만, 타락과 숭고함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된다.



  잘 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었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돌연 가족과 생업을 내팽개치고 프랑스로 떠난다.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은 '나'가 간곡하게 설득해보아도 그는 돌부처처럼 그림에만 몰두한다. 한 푼도 없이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동료 화가들의 외면과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는다. 오직 '나'의 친구이자 선량한 네덜란드 화가 '더크 스트로브'만이 그의 천재성을 눈여겨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뿐이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친절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트로브의 부인과 바람이 나고, 결국에는 또다시 모든 것을 저버린 채 타히티로 떠난다.


  스트릭랜드는 고결하고 천재적인 예술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기이하고 파렴치한 미치광이다. 먼 밤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달'과 1919년 당시 영국의 통용화폐 중 가장 낮은 단위였던 '6펜스'의 대비는 스트릭랜드의 이러한 양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그라는 인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설은 일견 스트릭랜드의 파렴치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인께 안 돌아가시겠단 말인가요?" 마침내 나는 물었다.
"절대 안 돌아가오."
"부인께서는 다 없던 일로 하고 새로 출발하실 수 있다고 하던데요. 아무런 탓도 하지 않으시고요."
"멋대로 하라지."
"사람들이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해도 괜찮단 말인가요? 부인과 아이들이 비렁뱅이질을 해도 상관없고요?"
"상관없소."
나는 다음 말에 힘을 주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일부러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 천하의 악질이군요."
"자, 이제 그만큼 했으면 속이 후련할 테니, 가서 저녁이나 합시다."


  '나'는 거리낌 없이 스트릭랜드를 사악하다고 말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모두 그렇게 말한다. 스트릭랜드를 아는 유럽인이라면 모두 그를 혐오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실로 그렇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나 몰라라 팽개쳤고, 모두가 그를 모욕할 때 혼자 스트릭랜드의 편에 선 스트로브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는 "천하의 악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물들이 그의 사악함을 부각하면 부각할수록, 소설은 아주 교묘하게 스트릭랜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소설은 절대로 직접 '스트릭랜드는 사악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다른 인물들이 '스트릭랜드는 사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가 듣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가 직접 스트릭랜드에 대해 말할 때에도, '나'의 신상과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가 '나'에 이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즉,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스트릭랜드는 사악하다'라는 진술에 거리감을 갖게 한다.


  '과연 스트릭랜드는 사악하기만 한가?'라는 의문이 생겼다면 이미 늦었다. 거리감이 생긴 후에는 걷잡을 수 없다. 우리는 서머싯 몸의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소설은 '그에게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생각을 향해 우리를 몰고 간다. 스트릭랜드의 마수에 단단히 잡혀 든 우리처럼, '나' 역시 스트릭랜드와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미묘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나'가 스트릭랜드의 발자취를 쫓아 타히티에 도착한 후, 그의 감정은 혐오에서 동정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히티 사람들은 유럽인과 달리 스트릭랜드를 동정하고 그의 기이함에는 개의치 않아한다. '나'는 스트릭랜드를 덮어놓고 미워한 유럽인들에게 회의감을 느낀다. 그가 처음부터 타히티 같은 곳에서 살았다면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불쌍히 여기면서.


  하지만 우리는 '나'의 감정이 단순한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동경'에 가깝다. 그것은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꽃피워 준 타히티 섬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천재성을 꽃피운 스트릭랜드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이때, 이러한 동경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주목하자. '나'는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유럽에 보내 팔았다는 백인 농장주의 진술을 듣는다. "이건 걸작이니 삼만 프랑을 주겠다지 뭐야!"


  스트릭랜드에 대한 '나'의 동경은 결국, 그의 능력이 벌어들이는 돈과 명예와 권위를 향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순수한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동경인 것처럼 포장되면서 말이다. 소설은 근대 유럽의 가치로서는 재단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을 평가할 때에는 또다시 근대 유럽의 위치로 돌아온다. 『달과 6펜스』는 어디까지나 '나'의 소설이지, 스트릭랜드의 소설이 아니다.



  19~20세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예술의 순수성'이란 그런 식으로 교묘하다. 마치 고독과 가난이 예술의 본령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말로 고독하고 가난해서 잊혀진 예술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부와 명예에 초연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들의 '순수성'이 결국 부와 명예로 보상받게 될 거라 믿는다. 이런 식의 '순수 예술'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권위에 복속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술이다. '나'가 눈여겨보는 것은 스트릭랜드로 인해 고통받은 주변인들의 슬픔이 아니라,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명예와 권위일 따름이다.


 가장 순수한 예술은 가장 정치적인 예술이다. 다음 시대의 세계문학전집에는 『달과 6펜스』의 이름이 남아 있게 될까.  사르트르의 다음 언급을 덧붙이며 글을 놓는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최악의 좌절이 되리라. 자기의 감정을 종이 위에 투영한다면, 그것을 기껏해야 그 감정을 따분하게 연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리라. (…) '쓴다는 작업'은 그 변증법적 상관자로서 '읽는다는 작업'을 함축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의 연관된 행위는 서로 다른 두 행위자를 요청한다. 정신의 작품이라는 구체적이며 상상적인 사물을 출현시키는 것은 작가와 독자의 결합된 노력이다. 예술은 타인을 위해서만,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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