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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Dec 20. 2019

무의미의 의미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1953년 1월 5일, 재정 위기로 폐관 위기에 처해 있던 파리 바빌론 소극장에서 어느 무명 극작가의 연극이 상연되었다. 분위기는 암담했다. 이 극에 퇴짜를 놓은 여러 연출가들은 물론이고, 출연하는 배우들마저 극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예상은 뒤집혔다. 연극은 파리 예술계의 찬사를 받았고, 관객은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연극을 보아야 했다. 연극은 시대의 고전이 되었고, 극작가는 이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사무엘 베케트와 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이야기다.


〈Waiting for Godot〉 staging by Otomar Krejca, Avignon Festival, 1978



고도를 기다리며


극의 내용은 단순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인물이 언덕 위에서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대화를 나누며 고도를 기다린다. 이게 전부다. 격정적인 사랑도, 절체절명의 위기도, 터져 나오는 카타르시스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 간의 대화마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서로 딴소리를 하고, 그러다가도 어느새 다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불평하고 짜증을 내면서도,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 언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도는 날이 저물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난 것은 고도의 말을 전하기 위해 온 심부름꾼 소년뿐이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전갈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다음날인 제2막이 되어서도 그를 기다린다. 제2막이 저물어 갈 때, 나타난 것은 또다시 소년이다. 전하는 말은 똑같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말.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 이언 맥킬런(에스트라공)과 패트릭 스튜어트(블라디미르)


이쯤 되면 '대체 고도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대체 고도가 누구이길래 두 인물이 이토록 무턱대고 그를 기다린단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작가인 베케트 역시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며 함구한다. 추측은 난무한다. 구원, 자유, 빵, 희망…….


이에 묻고 싶다. 그게 중요한가?



기다림의 아이러니


상술했듯, 사무엘 베케트는 자신도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작품에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작품 속에 등장한 것에 대해서는 베케트 자신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베케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고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 대해서일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누구인가? 나이와 직업, 출신 등의 상세한 요소는 알 수 없으니, 그들이 극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두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영원히)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린다. 마치 전날의 기억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성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그들의 기다림은 멍청하고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설명을 위해 극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포조(맨 오른쪽)와 그의 노예 럭키(맨 왼쪽). 포조는 원래 앞을 볼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제2막에서 눈이 먼 채로 등장한다.


Pozzo : 사람 살려!
Estragon : 그만 가자.

Vladimir : 갈 순 없다.
Estragon : 왜?

Vladimir : 고도를 기다려야지.

Estragon : 참 그렇지. (잠깐 침묵) 뭘 한다?
Pozzo : 사람 살려!
Vladimir : 살려줄까?

Estragon : 어떡하면 되는데?
Vladimir : 저놈이 일어나고 싶어 하잖아?
Estragon : 그래서?
Vladimir : 저놈이 일어날 수 있도록 거들어주는 거지.
Estragon : 좋아. 그럼 거들어주자. 망설일 거 없다.



위 대목에서, 넘어진 맹인 '포조'를 두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그를 도와줄지 말지 옥신각신하다가 이내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 딴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딴소리가 끝나고 에스트라공은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자고 말한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포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에스트라공 역시 이에 수긍하고 고도를 기다리기로 한다. 이때 포조가 다시 고함을 지른다. "사람 살려!" 이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로 한다.


Samuel Beckett(1906~1989)


위 대목처럼, 극 중에서는 두 인물이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림으로써 사건이 진전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드라마틱한 전개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헛도는 대화와 꽉 막힌 채 정체된 사건이 그제야 비로소 조금 진전되는 정도다. 그 이후에는 또 헛소리의 반복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어쨌든 사건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림'의 효과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극 내내 불편함과 허기짐과 지루함과 방황을 겪는다. 그 모든 고통을 겪으며 두 인물은 자연스레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바로 그때 그들 중 어느 한쪽이 말한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이로써 두 인물은 도피를 단념한다.  그들은 기다림을 통해 고통을 견딜 의지를 얻는다.


극에서 사건을 진전시키는 동력은 바로 이 의지다. 그들의 의지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체조를 하게 만들고, 무를 먹게 만들고, 나무를 살펴보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포조를 일으켜 세우게 만든다. 그들의 의지가 그들 자신을 변화하게 만들고, 나아가 타인과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결코 오지 않을 존재를 기다린다는 무의미하고도 비이성적인 행위가, 고통을 견딜 의지를 낳고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유의미한 행위를 산출한다.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다. 이러한 아이러니야말로 우리가 체화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꿈꾸고 미워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의지를 얻고 변화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비이성적인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개인의 삶을 넘어 세계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역사란 이성과 진보와 과학과 계획과 지식과 계몽이 이룩한 창달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스치듯 떠오르면서 조금씩 진전해 온 기다림의 기록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왜냐고? 그야 물론, 고도를 기다려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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