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조리극 주인공의 매력에 관하여
연말이 되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괜히 올 한해는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싶어지죠.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조커” 입니다. 조커는 2019년 10월에 개봉하여 흥행한 영화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베니스 황금사자, 골든 글로브 등 쟁쟁한 영화제에서 수상했지요. 이 영화는 연출, 스토리, 음향 등 전반적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이런 인기와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캐릭터겠지요. 뛰어난 연기와 연출로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감독의 연출과 스토리, 호아킨 피닉스의 몸짓과 호흡 등은 다른 수많은 리뷰에서 다룬 전적이 있으니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오늘은 조커 같은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왜 매력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부조리극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부조리극은 세계대전 이후로 나타난 극의 한 장르입니다. 세계대전은 낭만이라는 허상을 단박에 부숴버린 사건이었죠.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대량으로 죽어나가는 것에 유럽 사회에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특히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큰 충격감과 회의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충격을 배경으로 등장한 부조리극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갈래답게 인간 본성에 대한 해체와 의심이 주요한 특징이 됩니다. 이러한 부조리극의 대표작은 “고도를 기다리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추락한 인간성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들은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요. 조커는 부조리극의 한 갈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커는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출발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이 벗어버리려고 애쓰지만 벗어버릴 수 없던 신발은 조커가 낑낑대며 어떻게든 신으려는 신발이 됩니다. 인간성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려는 방식의 차이가 되는 것이지요.
부조리극의 용어 출처가 된 것은 “시지프 신화”라는 소설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 책의 구절 중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라는 문장에서 따온 것이죠. 알베르 카뮈는 그의 다른 소설 “이방인”에서 부조리에 처한 인물을 묘사합니다. 바로 주인공 뫼르소 입니다. 이 뫼르소는 소설에서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여자와 바다에 놀러가고, 코메디 영화를 보고 웃으며,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뫼르소는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저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이기 때문이죠. 세상의 어떤 가치도 큰 연관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사형선고를 기점으로 뫼르소의 태도가 바뀝니다. 세상은 그때부터 뫼르소에게 무관심해집니다. 뫼르소는 그 무관심에 큰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긍정해준다고 느끼죠.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 이제 내게 남은 소원은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이 지르는 증오의 함성 뿐이다.”
조커 또한 이방인입니다. 그는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지요. 그는 학대, 정신질환, 가난 등으로 세상에게 배척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커는 어떻게든 약을 먹고 어머니를 보살펴가며 세상에 진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영화가 점차 진행되면서 이러한 세상의 억압을 하나하나 부숴갑니다. 이러한 해방의 과정은 점차 넓은 곳에서 춤을 추는 조커의 모습을 통해 시원하게 보여지죠. 농담도 그렇습니다. 조커는 세상을 웃기려고 시도했습니다. 이 웃음은 자신의 정신질환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이 공감하여 같이 웃어주는 것을 소망하였지요. 그러나 세상과 조커는 절대로 웃음의 타이밍이 맞을 수 없었습니다. 조커는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려 애쓰던 자신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쏴 죽여 놓고 낄낄대며 웃는 사람이 되죠. 조커는 이제 세상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행복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뫼르소와 조커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그들만의 답을 내렸고, 스스로를 긍정하고 있으니까요. 끊임없는 해체와 의심 끝에 혼돈으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억압과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해방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버리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의 충동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살인을 부추긴다거나, 반사회적 메시지를 정당화한다는 우려도 생기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