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 타종행사만큼이나 우리의 새해를 설레게 하는 건, 바로 올해의 개봉예정영화들일 겁니다. 2020년에는 여느 때보다도 기대작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를 모으는 작품은 역시 '마블 영화'들이겠죠. 〈어벤저스 : 엔드게임〉과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으로 '인피니티 사가'를 마무리한 마블 스튜디오는, 올해 〈블랙 위도우〉와 〈이터널스〉 등의 개봉을 예고하며 그들의 '유니버스'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2020년부터 시작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4 라인업
Shared Universe
히어로 영화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레 관련 개념이나 용어들도 일상 속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를테면 '유니버스(Universe)' 같은 단어 말입니다. 유니버스란 둘 이상의 독립된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을 뜻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장기적인 기획 의도를 가지고 허구적 세계를 선형적·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허구적 세계를 선형적으로만 구성하는 '시리즈(Series)'나,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는 '크로스오버(Crossover)'와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구성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니버스의 개념을 처음 정의한 만화사학자 도널드 마크스타인(Donald Markstein)은 유니버스 형성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캐릭터 간의 만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두 캐릭터가 한 편의 이야기에 함께 출연해야 한다는 거지요.
만나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각각의 인물은 서로 독립된 작품의 등장인물이어야 합니다(해리 포터와 볼드모트가 만난다고 해서 해리 포터 유니버스가 생기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에 유니버스는 여러 작가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니버스는 특정한 개인의 창작품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따로 노는 애들이 지속적으로 만나야 유니버스가 성립된다
한마디로 유니버스란 여러 개의 이야기가 앞뒤로도, 동시에 옆으로도 엮여 있는 서사 형태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대충은 알겠는데, 정확히 감이 안 잡힌다고요? 당연합니다. 유니버스는 아주 현대적인─즉 낯선 서사 형태니까요.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유니버스조차 1930년대부터 시작됐고, 마크스타인이 이를 정의한 건 1970년도의 일일 정도입니다. 대중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유니버스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9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유명한 스타 작가들의 유니버스가요. 그들이 누구냐고요? 놀라지 마시길. 바로 이상과 박태원입니다.
경성유니버스 : 「날개」와 「보고」
이상(金海卿, 1910~1937)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天才)」를 아시오?
「날개」는 이상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소설입니다. 빈곤한 지식인인 '나'는 그나마 약간의 돈을 버는 아내에게 얹혀 살아갑니다. 아무런 희망도 비판적 자각도 없이, 그저 좁은 방 안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의 일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내가 매춘을 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충격에 빠진 그는 거리를 방황하고, 이 모든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나'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이상, 「날개」 중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이상은 「날개」의 배경을 우울하게 묘사합니다. 꼼꼼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성실한 묘사를 이어나가며, 이상은 「날개」의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18가구가 늘어서 있는 33번지'라고 지정합니다.
박태원(朴泰遠, 1910~1986)
한편 박태원은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인텔리 지식인인 '나'에게는 역시 인텔리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가 웬 낯선 여성과 함께 살림을 차리고 궁핍하게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의 가족은, 결혼 생활을 그만 두고 돌아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합니다.
이때 그가 찾아가는 친구의 살림집 주소는 이렇습니다. "대항 권번 근처의 관철동 삼십삼번지." 게다가 박태원은, 그 삼십삼번지에 열여덟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고도 묘사합니다. 이상이 「날개」에서 묘사했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보고」에서 볼 수 있는 친구 내외의 결혼 생활은 「날개」의 주인공 내외가 보여 주는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이것이 과연 우연이나 표절일까요? 당시의 정황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선 이상과 박태원은 실제로 절친한 친구였으며, 문학적·사상적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날개」와 「보고」는 모두 1936년 9월호 잡지(「날개」는 《조광》, 「보고」는 《여성》)에 발표된 작품이었습니다. 친구이자 동료인 두 사람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배경과 인물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발표했다면, 이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문학적 기획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같은 대상을 바라 보는 두 소설의 시선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울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날개」의 주인공과 달리, 「보고」의 주인공은 친구 내외의 생활이 매우 다정하고 행복해 보였다며, 그래서 차마 편지를 전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유니버스의 정사(Canon)는 뭘까요. 글쎄요,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둘 다 진실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죠. 이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건 어쩌면, 하나의 시선만으로는 포착해낼 수 없는 입체적인 세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성유니버스의 아쉬운 종결
이토록 야심차게 시작했던 경성유니버스는, 1937년에 이상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아쉽게도 일찍 막을 내리고 맙니다. 한편 박태원은 『천변풍경』 등의 실험적인 모더니즘 소설은 물론, 아동소설과 추리소설에까지 영역을 넓히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 갑니다.
빨리 끝나 버렸다고는 해도, 이들의 기획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시도였습니다. 문학 작품이란 한 개인의 온전히 독창적인 창작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협업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으니 말입니다.
언젠가 세계는 한 권의 책이 될 거라고, J. L. 보르헤스는 말했다고 하죠.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권의 책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시대는 이미 왔네요. 90년 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 문학의 즐거운 시도가,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