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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Mar 08. 2019

올 봄 로맨스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19세기 러시아의 사랑 이야기

봄, 사랑, 벚꽃,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3월입니다. 봄 날씨네요. 이는 곧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멜론 차트에 다시 올라온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장범준이 다시 돈을 번다는 뜻이고, 사람들 기분은 괜히 들뜨기 시작한다는 뜻이죠. 또한 봄꽃들이 피기 시작한다는 뜻이며, 롱패딩을 벗어던지고 마음껏 멋내기 좋은 시즌이라는 뜻인 데다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 봄이네요.


미세먼지 없는 벚꽃나들이를 꿈꿉니다.


   다시 말해, 로맨스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물론 로맨스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각자에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 화사한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은 싱숭생숭한 기분일 수도 있겠구요. 누군가는 이제 막 호감을 갖고 가슴 설레는 눈치게임을 할 수도 있겠구요. 누군가는 벌써부터 완연한 봄을 만끽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어쩌면 조금 슬픈 계절을 맞은 사람도 있겠구요. '로맨스? 그게 뭐야. 난 공부하느라/일하느라 바빠.'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들이 모두 모여 '로맨스'라는 걸 이룹니다. 이처럼 로맨스의 면면은 봄꽃만큼이나 다채롭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야기할 책은,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이야기 할 때마다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누구누구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어디어디 선정 필독서 몇 선', 그런 거요.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모든 책들이 그렇듯 『안나 카레니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저도 그렇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또 싫어합니다. 특별할 거 없다는 얘깁니다. 치렁치렁 달린 거창한 수식어들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안나 카레니나』를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껍기까지...


   이건 그냥 사랑이야기입니다. 옆구리 시린 이야기도 나오구요, 썸 타는 이야기도 나오구요, 불꽃 같은 사랑 이야기도 나오구요, 결혼 이야기도 나옵니다. '난 연애 같은 거 절대 안 해!'라고 다짐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나옵니다. 아, 불륜과 바람 이야기가 빠지면 섭하죠. 비극적인 이별도 빼놓을 수 없구요.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아닌가요? 맞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19~20세기 러시아와 유럽을 휩쓴 로맨스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도깨비>나 <남자친구>나 <로맨스는 별책부록>처럼요. 절대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닙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5년부터 《Ру́сский ве́стник(루스키 베스트니크)》라는 잡지에 연재된 소설이거든요. TV나 라디오가 없었던 시대에 드라마를 전파할 수단이 잡지 말고 뭐가 있겠어요. 어때요, 이러면 좀 재밌어 보이나요?

요즘 넷플릭스로 보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들여다 보기 :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남의 연애 이야기


   로맨스 드라마가 재밌는 이유는 그게 남의 연애이야기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어떤 위험을 부담하지 않아도 드라마에서는 기승전결에 맞추어 대신 연애를 해 줍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와 바렌카의 이야기를 이야기 해 보도록 합시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이성(理性)의 화신 같은 사람입니다. 러시아의 저명한 지식인이고, 책도 많이 쓰고, 모든 일에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친척 조카들의 가정부인 바렌카를 사랑하게 됩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아주 이성적으로 고민합니다. '내가 과연 바렌카를 진심으사랑하는 걸까?', '내가 바렌카를 사랑하는 만큼, 바렌카도 나를 사랑할까?', '나와 바렌카가 결혼했을 때, 혹시 방해되는 점이 있지는 않을까?', '그 방해되는 점을 어떻게 극복할 있을까?' 하지만 친척 조카들과 버섯을 따러 숲으로 향한 그는, 함께 따라 바렌카를 마주하모든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바렌카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은 말없이 몇 걸음 나아갔다. 바렌카는 그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일지 추측하면서 기쁨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바렌카로서는 말없이 있는 편이 더 좋았다. 그들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기에는 버섯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보다는 침묵이 흐른 후가 더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치 우연이기라도 한 듯, 바렌카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럼 버섯을 하나도 못 찾았단 말이에요? 하긴, 숲 속에는 버섯이 늘 더 적기 마련이죠."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한숨만 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버섯 이야기를 꺼내어 화가 났다. 그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순간으로 그녀를 돌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기라도 하듯, 그는 몇 분 동안 침묵한 후 그녀의 마지막 말에 대해 소견을 말했다.
   "하얀 버섯이 주로 숲 언저리에서 자란다는 말을 듣기만 했을 뿐, 하얀 버섯을 식별하지는 못합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와 바렌카는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남은 것은 그걸 확인하는 일 뿐입니다. "사랑합니다." 또는 "결혼해 주세요"라는 단 한 마디만을 남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갈피를 못 잡고 뱅글뱅글 돕니다. 고작해야 버섯, 버섯, 버섯 이야기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TV로 이걸 보고 있었다면, 초조하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몇 분이 흘렀고, 그들은 일행들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완전히 단둘만 남게 되었다. 바렌카의 심장이 너무나 세차게 뛰어 그 고동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얘졌다, 다시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같은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며 살던 처지에 있다가 온 그녀에게는 행복의 절정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결정될 것이다. 그녀는 두려웠다. 그가 말을 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말을 하지 않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보통 이런 데서 한 번 끊고 광고가 들어가는데요.

5월에 발간 예정인 저희 잡지입니다. 60초 후 계속...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도 그것을 느꼈다. 바렌카의 시선, 홍조, 내리깐 눈동자 속의 모든 것이 병적인 기대를 드러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것을 보자 그가 가엽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이 순간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곧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까지 느꼈다. 그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자신의 심을 도와줄 온갖 이유를 외워 보았다. 그는 청혼의 뜻을 밝히기 위해 하려고 했던 말을 자신에게 되풀이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 대신, 난데없이 그의 머릿속에 오른 어떤 생각에 이끌려,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하얀 버섯은 자작나무 버섯과 어떻게 다릅니까?"
   바렌카가 대답할 때, 그녀의 입술이 흥분으로 바르르 떨렸다.
   "갓 모양에는 차이가 없고 뿌리 모양이 다르죠."


   이성의 화신 같았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바렌카에게 청혼을 하자고 스스로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나약함과 사랑의 불가해함 앞에서 알량한 합리와 이성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번듯하고 폼 나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순식간에 소심한 남자로 돌변합니다. 겨우 한다는 말이, "하얀 버섯은 자작나무 버섯이랑 어떻게 달라요?"라니. 탄식이, 원성이, 누군가에게선 욕지거리가 튀어 나올 순간입니다. '아니 거기서 그런 말을 해!!!'라고요. 김신이 마지막에 지은탁 보고 '느타리버섯이랑 표고버섯이 어떻게 달라?'라고 물어봤으면 어땠을까요. 전국 버섯농가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떤가요? 로맨스 소설로서  『안나 카레니나』 의 파일럿 에피소드는 재밌었나요? 흥미로웠나요? 만약 그랬다면, 훌륭한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방영한 지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드라마도 유치하고 오글거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마당에, 100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재밌는 드라마가 있다면 훌륭한 드라마 맞죠. 그런 의미에서 올 봄 로맨스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어떠세요?


Ivan Kramskoi,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1883, Oil on canvas, 75.5 cm × 9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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