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소드/실드>를 기대하며
게임으로서 <포켓몬스터>를 즐기는 사람들의 타입은 포켓몬의 타입만큼이나 다양하다. 포켓몬 월드챔피언십 2014에서 파치리스로 우승을 차지한 '박세준' 선수처럼 치밀한 육성과 전략적인 전투를 즐기는 '베테랑 트레이너 타입.' 네이버 블로그 <미오시티의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블로거 '리오메'처럼 게임 내 정보와 공략을 다루는 '포켓몬 박사 타입', 유튜브 채널 <YOUTUBE 로닌>을 운영하는 유튜버 '로닌'처럼 게임 속 버그와 더미 데이터를 다루는 '오컬트마니아 타입' 등등..
그러나 모든 유저들은 근본적으로 '여행자'다.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포켓몬 세계'로 여행을 떠나 새로운 세계가 보여 주는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사건들을 겪으며, 그 속에서 설렘과 흥분을 만끽하는 것이 '포켓몬 유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포켓몬스터>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에는 커다란 제약이 걸려 있다. 스마트폰 화면 정도의 작은 네모 칸만으로 그 세계를 체험해야 한다는 제약이. 실제 여행지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바람, 열기, 음식의 맛과 냄새 등을 게임 콘솔을 통해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마저도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게임이 제공하는 시선에서만 게임을 즐겨야 한다.
1~4세대 : 하늘에 달린 눈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시작인 <포켓몬스터 레드/그린>부터 한국에서 포켓몬스터 게임이 본격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포켓몬스터DP 디아루가/펄기아>, 그리고 4세대의 기념비적 완성작 <포켓몬스터 하트골드/소울실버>에 이르기까지 포켓몬스터 게임의 주된 시점은 '3인칭 하늘 시점'이다. 플레이어는 2등신으로 조그맣게 줄어든 주인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사각 타일 속의 세계에서 주인공 캐릭터를 조종해야 한다.
이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의 일정 구역이다. 이 때 우리는 화면에 비춰지는 모든 구역을 같은 시점에서 바라본다. 도로를 걸어가도, 건물에 들어가도, 전설의 포켓몬을 마주해도 우리의 눈은 항상 하늘에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 시야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인공 캐릭터가 있다. 화면 속에서 주인공 캐릭터가 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세계는 '주인공 캐릭터의 주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5세대 : 변화의 시작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포켓몬스터 블랙2/화이트2>는 기본적으로 1~4세대까지의 시점과 동일하다. 여전히 세계는 사각 타일이고, 우리는 하늘 위에서 주인공과 세계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달라진 점도 있다. '스카이애로 브릿지', '배틀서브웨이'처럼 기존의 사각 타일형 맵 디자인이 아닌 곡선형, 원형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맵이 디자인되었다는 점. 그리고 고정된 시점에서 탈피하여 상황에 따라 다양한 시점이 사용되었다는 점.
6세대 : 진정한 3D의 세계
<포켓몬스터 X/Y>와 <포켓몬스터 오메가루비/알파사파이어>는 게임의 메인 플랫폼이 NDS에서 3DS로 교체된 세대다. 이로 인한 변화는 GB/GBA(게임보이/게임보이 어드밴스)에서 NDS로 교체된 <포켓몬스터DP>의 변화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지형지물을 표현하는 데만 3D 디자인이 사용되었던 NDS와 달리, <X/Y>부터는 맵 뿐만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와 포켓몬까지 전부 3D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대부분의 맵이 여전히 사각 타일형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지만, 3DS에서 새롭게 추가된 슬라이드 패드를 통해 전후좌우의 직선적 움직임이 아닌 자유로운 곡선적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블랙/화이트>에서 맛보기로 실시되었던 시점의 변환이 <X/Y>에 이르러서는 전폭적으로, 더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움직임에 따라 전후측면의 도트 스프라이트를 하나하나 만들어야 했던 전작들과 달리 3D 모델링을 각도에 따라 다르게 조명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가 가능해졌다.
7세대 : 사각 타일 너머로
<포켓몬스터썬/문>과 <포켓몬스터 울트라썬/울트라문>은 <X/Y>부터 적용된 굵직한 변경점을 계승하면서 한 단계 발전시키고 있다. 3D 디자인은 더욱 정교해져 주인공 캐릭터를 비롯한 인물들의 모델링이 보다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듬어졌으며, <X/Y>에서 지적되었던 카메라 워크의 난잡함이 조정되었다.
<썬/문>의 특별한 점은 이제까지의 사각 타일형 맵 디자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이다. 건물이나 도시는 물론이고 산천이나 풀숲 같은 자연 지형까지도 직각으로 디자인되었던 종래의 맵 디자인이 자취를 감추고, 보다 현실의 자연을 닮은 불규칙적 지형이 디자인되었다. 이에 따라 십자 패드를 이용한 전후좌우 이동방식은 폐지되었으며, 슬라이드 패드를 이용한 자유 이동 조작이 모든 이동 방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포켓몬스터>의 시점은, 그리고 이 시점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점의 변화가 게임을 체험하는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시점이 변할 때 우리의 여행은 어떻게 변할까?
시점은 '사건을 받아들이는 위치'다. 다시 말해, 시점의 변화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위치의 변화다. 예를 들어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과 같은 1인칭 시점의 게임에서는 주인공 캐릭터가 곧 플레이어와 동치되며 이를 위해 주인공 캐릭터의 구체적인 외형이나 설정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은 3인칭 시점의 게임에서는 주인공 캐릭터가 플레이어 본인과는 다른 존재, 즉 독자적인 외형과 설정, 자기만의 대사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잦다.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시점은'주인공(여행자)=플레이어(관찰자)'의 도식에서 점차 벗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포켓몬스터> 시리즈는 계속해서 3인칭 시점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맵 디자인과 캐릭터 표현 방식의 변경, 그로 인한 이동 방식의 변경이 불러 온 '카메라 워크'는 우리가 포켓몬의 세계를 여행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예를 들어, <기라티나>에서 전설의 포켓몬이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태홍이 디아루가와 펄기아를 한 번에 불러냈다가 기라티나에게 잡혀 가는 컷신은 스토리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 컷신 내내, 모든 사건의 관측은 평범한 여행에서의 시점과 동일한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여행을 통틀어 제한된 시야에서 오직 주인공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에, 플레이어는 자연스레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다.(여행자=관찰자)
한편, <블랙/화이트>에서 전설의 포켓몬이 등장하는 장면은 어떤가. 포켓몬리그에 갑자기 등장한 N의 성에서 라이벌 'N'과 마주한 주인공은 전설의 포켓몬 레시라무/제크로무의 현신을 목격한다. 이 때, 전설의 포켓몬이 현신하는 바로 그 컷신은 여행에서의 시점과 다른 시점에서 관측된다. 이 이벤트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에게 이입하던 시점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쓰일 뿐이다.
그러나 <썬/문>에서는 또 어떤가. 3DS작 부터는 고정된 시점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다양한 상황에 다양한 시점이 사용되고 있다. 전설의 포켓몬과 만나는 순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이동과 여행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다양한 시선에서 조명된다. 이와 더불어 조작이 통하지 않는 컷신이 전작들보다 훨씬 자주 사용되고, 이에 따라 인물에 얽힌 설정과 스토리가 구체화되었다. 전통적으로 별다른 설정이 부각되지 않던 주인공 캐릭터에게도 '관동지방에서 온 이민자'라는 설정이 주어진다. (여행자≠관찰자)
이것이 개별 플레이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변화가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감정적 몰입을 도와 주고, 연출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다'고 평할 수도 있다. 전설의 포켓몬이 현신하는 순간, 가장 큰 악당을 물리치는 순간, 포켓몬 챔피언이 되는 순간……. 기억에 남을 순간을 더욱 특별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싶은 건 모든 유저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상상과 재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었던 과거작들과 달리, 특정한 관점을 강요해 플레이어 나름의 다양한 상상을 방해한다'고 평할 수도 있다. 동굴에 들어가 미로를 헤메는 도중, 화면 테두리에 살짝 걸쳐 있는 환상의 포켓몬을 발견하는 순간의 짜릿함이 컷신에는 없으니까.
물론, 이는 모두 타당한 감상이다. 포켓몬스터의 세계는 우리 모두를 포용할 만큼 넓으니까. 8세대 포켓몬스터 <소드/실드>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닌텐도 스위치 최초 이식작이라는 타이틀에 맞추어 <포켓몬스터>가 우리에게 또 어떤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지, 포켓몬 유저라면 누구나 설렐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