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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pr 05. 2019

BewhY와 윤동주

70년을 가로질러 이어지는 스웨그


3월 29일, 비와이의 새로운 싱글이 발매되었습니다. <찬란>. MBC 예능 프로그램 '킬빌'에서 보여주었던 랩을 음원으로 발매한 건데요. 베테랑 셰프의 칼질처럼 자유자재로 박자를 쪼개는 랩스킬에 감탄하던 와중 이런 가사가 들렸습니다.


"검은 척 하려는 쟤와 달리 내 정체성은 대한인"


비와이의 랩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리 신기한 라인은 아닐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와이는 2016년엔 MBC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 특집'에서 양세형과 함께 <만세>를, 2017  <>  <>, 2019년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나의 땅>을 불렀으니까요. 그는 당당한 '민족래퍼'입니다.


동시에 그는 유명한 '주님스웨거'이기도 합니다. <찬란> 속에서 그는 "찬란함 나의 것 또 찬란한 나의 영 나의 혼 나의 몸 나의 손 안에 찬란한 bible"이라 말합니다. "내 삶은 바로 신이 만들 예술작품의 Featuring(♬The Time Goes On)", "무언가를 얻지 못해도 난 걷지 믿음으로 역시 주님께 맡겼지 그가 원한다면 가고 아님 말아(♬Forever)"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비와이의 이런 모습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성을 연결시킨 윤동주의 시세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음, 잘 모르겠다구요? 그럼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독실한 주님스웨거


윤동주가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명동촌입니다. 명동촌은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의 크리스천 지식인들과 그 가문이 집단 이주해 형성한 정착촌으로,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동네였습니다.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윤동주는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윤동주의 독실한 신앙심은 그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십자가>에서 윤동주는 '신앙적 가르침을 따르는 일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합니다. 윤동주는 자신을 따라오던 햇빛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햇빛은 더 이상 윤동주에게 있지 않고,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다시 햇빛을 되찾아야겠지만 첨탑은 너무 높기 때문에 올라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렇다고 햇빛 없이 지상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 때 윤동주가 택하는 방법은 들려오지 않는 교회의 종소리로 상징되는 신의 목소리를 휘파람이라는 개인적 형태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결단의 순간이 왔을 때 신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내어놓겠다는 각오, 이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마지막 연에서 드러납니다. 이 때 눈여겨볼 것은 순교의 기회가 스스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쉽게 쓰여진 시>)"에서도 드러나듯, 그것은 신이 윤동주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은 십자가의 형태로 윤동주에게 주어집니다. 십자가라는 매개물을 통해, 지상의 윤동주와 하늘의 햇빛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에는 '신앙적 소명에 의한 신(하늘)과 인간(지상)의 수직적 매개'의 구도가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학교에서 단순히 '부끄러움'과 '참회'의 정서라고 배우는 <자화상>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물이 비추는 것은 달, 구름, 하늘, 바람입니다. 이는 모두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모여 가을, 즉 현재의 세계를 이룹니다. 한 사나이는 그런 하늘 속에 있습니다. 윤동주는 이 사나이를 미워하다가, 가엾어하다가, 다시 미워하다가,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이는 분명 윤동주일 것입니다. 물의 표면은 들여다보는 사람을 비추니까요. 그러나 윤동주가 계속해서 방황하는 동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을 뿐 방황하지 않습니다. 즉 사나이는 윤동주이면서 윤동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가 우물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사나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전히 우물 속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나이는 물에 비친 윤동주의 모습이므로, 윤동주가 우물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에는 사나이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이는 윤동주를 따라다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윤동주가 방황하는 동안 언제나 그와 함께하는 존재. 그는 곧 신입니다. 여기서 우물은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적 매개가 됩니다.



비와이의 랩에서도 신과 인간을 잇는 수직적 구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가 원했던 것 그리고 소망하는 것 중 너가 대체 이룬 것은
있냐? 꿈을 찾는다면서 쓸 데 없이 가는 대학교
부모 등골 파먹는 문제아죠 학교를 가는 이유에 대한 대답도
못하는 수동적인 따까리 멘탈로
끌려다니기 바쁜 절대 리더는 못될 놈
자기주장 못 펼치고 또 쎈 척
쿨 한 척 하는 그런 놈이 너잖아 제발 좀 솔직해

비와이, <자화상> 중


<자화상>에서의 윤동주처럼 <자화상>에서의 비와이 역시 방황 중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는 아무런 보상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는 곧 "남들이 좋아하는 내용이나" 노래하라는 내면의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그냥 다 포기해"라는 자포자기가 고개를 듭니다. 햇빛과 멀어져 있는 윤동주처럼 결핍에 시달리는 비와이의 모습.


시간은 가지 tic toc 그 시간 속에서 기도로
나는 매일 손을 모으고 하늘로 부르짖어
의심 대신에 확신을 두려울 땐 담대함이 늘
나에게 머물도록 내가 나약한 내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 당신을 의지하게
날 세우소서 나는 아직까진 너무도 미비하기에
그러나 미비한 만큼 창대 하다는 것을 믿지 언제나
지금은 먼 미래지만 오늘이 되겠지 언젠가

비와이, <The Time Goes On> 중


방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같은 앨범('Time Travel')의 타이틀곡인 <The Time Gose On>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을 믿고 따르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밑바닥"임을 알면서도, "의심"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어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것. 혼자서도 열심히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 이것이 비와이의 휘파람입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
야망이 아닌 소명
광명을 따르지 않는 건
내 본질의 소멸
언제나 주시해 내가 보는
푯대를 노려
푯대를 노려 아주 소리 없이

비와이, <흔적> 중


그러다 보면 신이 비와이를 선택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신의 선택은 무언가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망이 아닌 소명이기에, 비와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다하기 위한 비와이의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 푯대, 즉 위와 아래를 잇는 기둥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4)"




투철한 민족스웨거


위에서 살펴보았듯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덮어놓고 '할렐루야'만 외쳤던 것은 아닙니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민족의 독립, 나아가 폭력을 거부하고 인간 존재의 자유를 열변하는 투사가 됩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여느 시처럼 <별 헤는 밤>에도 하늘이 등장합니다. 하늘은 곧 가을로 표현되는 현재의 세계 전체입니다. 그 속에서는 별들이 있고, 윤동주는 아무 걱정 없이 이 별들을 다 헬 수 있으리라고, 즉 신의 가르침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별들을 가려버리는 아침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이를 쿨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내일 밤이 남았다며, 아직 나의 청춘은 다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리라 다짐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십자가>에서 신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면, <별 헤는 밤>에서 그가 별을 헤기 위해 택한 방법은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 별 헤기는, 다른 나라 소녀들의 이름,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린 여자애들의 이름, 이웃들의 이름을 부르며 과거에서 현재로, 내 주변 사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추억과 사랑, 쓸쓸함, 동경을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들과 함께한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순간을요. 이는 곧 를 되새기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신이 내려준 "슬픈 천명(<스쉽게 쓰여진 시>)"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윤동주가 떠올리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내가 있게 해 준 나의 뿌리이자 가장 완전했던 사랑의 기억.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이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름을 쓰더라도 너무나 멀리 있다는 거리감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 때 윤동주가 궁극적으로 그리워하는 존재, 어머니가 있는  지역은 북간도(길림성 명동촌)입니다. 모국(母國)에 어머니(母)가 없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이 거리감이 생기는 이유는 윤동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1941년 말,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유학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적이었기에, 그는 1942년 1월 29일 '히라누마 도슈'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계를 신고합니다. <별 헤는 밤>은 이러한 일이 있기 전인 1942년 11월 20일에 쓰여졌지만, 윤동주는 그 전부터 일본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고민했겠지요.


<별 헤는 밤>에서 그가 언덕 위에 쓴 이름은 '윤동주'라는 조선식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당당히 내 이름자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반면 부끄러운 이름은 일본식 이름일 것입니다. 내 이름이라고 부르기도 치욕스러운 이름. 그러나 윤동주는 겨울이라는 혹독한 계절이 지나고 이 찾아오면 흙 아래 묻힌 '주' 이름이 죽지 않고 생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윤동주의 힘만으로 가능한게 아닙니다. 그것이 계절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별 헤는 밤>은 하나의 기도로 완성됩니다.


이처럼 윤동주는 현실과 마주하며 시를 썼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을 빌어 현실 도피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부 교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무작정 신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 그들이 보여 주는 신앙은 현실 타개의 의지 없이 신에게로 도피하는 무책임한 신앙입니다. 윤동주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구체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당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가 신을 부른 것은 이를 해결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그 속에서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 해 달라는 뜻일 겁니다.



Korea ura
우리는 자유 할 때가 자연스러운 법
자연스러운 것이 멋스러운거고
가진 걸 자랑하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건지

비와이, <나의 땅> 중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땅에다 이름을 쓰고 70년이 흘러, 비와이는 <나의 땅>에서 그 땅을 밟고 일어섭니다. "저들의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과 혐오 땜에 자유 할 권리를 짓밟힘"당한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그러나  "우리들의 만세는 복수가 아닌 다가올 내일의 천국을 향한" 것임 또한 기억하기. "힙합이 무슨 이런 이야기를 해?"라는 사람들에게 비와이는 가진 걸 자랑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고 멋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피부가 원천이 되어진 음악이네요
노란색에 물들 시간 yello Yelloism

비와이, <Yelloism> 중


제 꿈 중 하나가 한국에서 하는 힙합을 꼭 외국말로 하지 않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자기네 말로 번역해서 듣는 거예요. 글로벌적인 샤웃아웃이랄까요? 인종을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Yello'라는 단어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씨잼)

 ‘Yello’라는 것도 저랑 씨잼이 항상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비와이가 와서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도 항상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고요.(키보)

[인터뷰] 씨잼 (C Jamm)


이는 일회적인 이벤트성 라인이 아닙니다. 비와이는 꾸준히 동양인이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노래해 왔습니다. 이는 비와이가 속한 힙합 크루인 '$exy $treet'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맥락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한국인이 아닌 게 이제는 너의 칭찬이 돼
부정된 나의 피 나의 피부 이건 내가 바란 게 아닌데
진짜라는 게 내 얼굴이 까만 색깔일 때
라면 내 살을 때묻게 하는 게 답인지 아닌지 다들 왜 몰라
이제 엉덩이 밑에 안 걸치는 내 바지
검은척하려는 쟤와 달리 내 정체성은 대한인

비와이, <찬란> 중


힙합은 미국, 흑인, 게토 문화에서 발원한 장르입니다. 백인, 동양인처럼 흑인이 아닌 래퍼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대가 왔다고는 해도, 여전히 세계 리스너들의 리스펙을 받는 거물들은 흑인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들에 대한 리스펙은 자연스레 그들의 가사, 스타일, 패션 등 문화 전반에까지 이어집니다. 문제는 그것이 무분별한 모방에 이르는 경우입니다. "한국 힙합 특징 :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혼자 화나 있음"이라는 짤방은 자체적인 맥락 없이 미국식 힙합의 관습을 답습하는 한국힙합의 일면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MC워너비, "혼자 화난 래퍼들" https://brunch.co.kr/@mcwannabe/122)


'우리도 미국 힙합(혹은 흑인)처럼 하고 싶다'와 '우리는 미국처럼 할 수 없다' 사이 긴장과 갈등은 한국 힙합의 뿌리 깊은 논제입니다. 그러나 <찬란>에서 비와이는 그것을 "허접한 어릴 적 사고"라며 일소에 부칩니다. 비와이가 리스펙 하는 대상은 미국 힙합이 아닙니다. 그가 리스펙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의 역사입니다. "3.1운동의 자신감을 가진 나의 빛나는 강한 심장(<만세>)"


윤동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비와이의 라인 역시 한국 힙합의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무분별한 답습과 맥락 없는 흉내를 벗어나 우리가 있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걸 자연스럽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시도입니다. 비와이가 신에게 리스펙을 보내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놓인 어려운 현실 속에서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결핍된 현실을 직시하고 바꿔나가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그 과정에서 신을 믿고 겸손해지겠다는 신앙심'이 7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윤동주와 비와이를 이어지게 만듭니다. 물론 이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과 선택한 방법은 각자 다르기에 여러 차이점이 존재하겠으나, 핵심적인 정신과 태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둘은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결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멈추지 않으며, 비와이의 랩은 결코 '쇼미더머니 5'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각자의 성취를 넘어 연결되는 두 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뒤를 이을 새로운 '시인'을 기대해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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