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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pr 10. 2019

'다워야 한다'는 말

알베르 카뮈, 『이방인』

   누구나 한 번쯤은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어느 나라를 떠올리든, 상상 속의 그 나라가 여기보다는 살기 좋을 것 같다. 이 지긋지긋한 헬조선 땅이 아닌 곳에서.


   내 상상 속 나라는 프랑스였다.『이방인』을 읽고 나서였다. 뫼르소가 읊는 프랑스의 풍경이 담담하니 아름다워 보였던 까닭이다.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어둠 속에 떠오르던 첫 별빛들이 희미해졌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보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로등은 젖은 보도를 비추고, 전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나는 머리털, 웃음을 띤 얼굴, 혹은 은팔찌 위에 불빛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금 뒤에 전차들이 점점 뜸해지고, 벌써 캄캄해진 밤이 나무들과 가로등 위에 내려앉으면서 거리는 어느 틈엔가 인기척이 없어지고, 마침내 다시 쓸쓸해진 길을 고양이가 천천히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 되었다. 그때에야 나는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틀 동안의 휴가를 보낸 뒤, 침대에서 눈을 뜬 뫼르소는 오늘이 토요일임을 깨닫는다(이렇게 부러울 수가!). 그는 침대 위에 누워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해수욕장으로 향한 뫼르소는 그 곳에서 전 직장 동료 마리를 만난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함께 물놀이를 한 뒤 극장으로 향해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즐긴다.


   토요일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다음날이 일요일이라는 점이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눈을 비비며 일어난 뫼르소. 그는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낮부터 밤까지 발코니에 앉아 거리를 구경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담배를 피우고, 제 시각에 맞춰 도착하는 열차를 바라보다가 그는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낭만적이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휴일이,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직후라는 점이다. 애초에 그가 휴가를 신청한 이유부터가 모친상 때문이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 다름 아닌 모친의 장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꽤나 즐거운 주말을 보낸 셈이다. 일요일의 마지막을 보내며 그는 생각한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나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각을 했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뫼르소는 한 아랍인에게 총을 쏘아 죽인 죄로 재판에 회부된다. 그것이 정당방위였는지 아니면 고의적인 살인이었는지를 두고 다투는 법정 싸움에서, 주된 쟁점으로 다뤄지는 것은 오히려 모친상 직후 뫼르소가 보인 태도다. 검사는 모친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가로운 주말을 즐긴 뫼르소라면 필시 잔악한 살인마일 것이라 말한다. 변호사는 뫼르소가 사실 어머니를 끔찍히 사랑하고 열심히 부양했음을 주장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의 솔직한 진술이 불리한 증언이 될 수 있다며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이런 식의 논증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생각해본다면, 사실 이는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만나 볼 수 있는 논증이다. 내가 관여되지 않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3자인 우리는 그 사건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황을 통해 판단한다. 모든 일에는 맥락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므로. '걔는 무슨 우울증이라는 애가 그렇게 시시덕대고 다닌대?', '아프다는 애 치곤 너무 잘 놀던데, 엄살 아냐?', '그게 정말 강압적인 폭력이었다면 과연 그 뒤에도 함께 밥을 먹고 문자를 보냈겠어?' 같은.


   그러나 맥락(Context)이란 결국 '함께 두어(con-)' '짜 내는 것(text)'에 불과한 게 아닌지. 사건 자체를 알지 못하면서, 맥락만으로 진실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너무 큰 오만은 아닌지. 우리는, 결국 '맥락'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어째서 원인이 아닌 결과에게 금욕과 결백을 강요해왔을까. 어쩌면 '공동체의 무능함'을 제 몸으로 떠맡게 된 사람들에게 오히려 '공동체적 무능함의 죗값'을 물어 온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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