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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pr 17. 2019

다시 또, 4월.

최은영, 「미카엘라」를 또 읽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아?


많은 엄마들은 참고 산다. 남편이든, 자식이든, 그 외의 것이든.


「미카엘라」에 등장하는 수진(미카엘라)의 엄마는 참는 엄마의 전형이다. 아니, 그녀는 더하다. 그녀는 매사에 감사한다. "김치가 잘 익었다고 감사,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 마음껏 먹을 수 있음을 감사. 발가락에 난 사마귀 치료가 잘된 것을 감사.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심에 감사. 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일이 잘 안 풀리면 일이 잘 풀릴 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 감사."


수진은 그것이 답답하다. 엄마의 현실은 초라하다. 정작 부유하고 걱정 없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는데, 왜 가진 것도 없는 엄마가 감사해야 하는지. 병약한 나머지 일도 못 하면서 책과 노동운동에만 빠져 살던 아빠, 그래서 엄마에게 집안 살림이며 밥벌이마저 모두 떠맡긴 아빠를 그녀는 증오한다. 그런 아빠마저 불평 없이 끔찍이 아끼고, 그런 남편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던 엄마가 답답하다.


수진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세상에게 버림받은 채 스스로를 기만하며 공허히 감사를 되뇌는 삶은 살지 않기로 다짐한다. "세상이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자신을 소외시키고 변형시켜서라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편입되고 싶었다."




내 딸도 그날 배에 있었어요


「미카엘라」는 두 모녀 사이의, 정확히는 수진이 엄마에게 가지고 있던 거리감이 해소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수진은 교황 집전 미사를 보러 서울에 올라온 엄마가, 성당 사람들과 함께 숙소에서 잔다며 거짓말을 했음을 알게 된다. 일이 바쁜 자식을 방해하기 미안하다며 묵을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엄마가 눈에 선하다. 수진이 엄마를 발견한 곳은 광화문 광장을 비추는 TV 화면 속이다. 그녀는 광화문 광장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간다.


한편 수진의 엄마는 찜질방에서 만난 한 노파와 친해진다. 노파는 세월호 참사로 손녀를 잃은 친구를 찾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가려고 한다. 노파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수진의 엄마는 노파와 함께 광화문 광장으로 향한다. 찾는 사람이 어떤 학생의 유족이냐는 자원봉사자의 물음에 노파는 '미카엘라'라는 세례명을 말한다. 미카엘라. 딸인 수진의 것과 같은 세례명.


광화문 광장에 도착한 수진은 엄마로 보이는 여성에게 다가가 말한다. "엄마." 그러나 그녀는 수진의 엄마가 아니다. "아가씨. 내 딸도 그날 배에 있었어요. 내 딸을 잊지 마세요. 잊음 안 돼요." 그녀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유족의 모습은, 그 목소리는 엄마와 너무나도 똑같다.


「미카엘라」는 모녀의 갈등이 해소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수진이 깨닫는 것은 엄마의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수진이 깨닫는 것은, 참사가 자신의 일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참사는 여객선 침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말을 걸었던 유족의 자리에 있는 것이 우리 엄마였을 수도 있다. 수진의 엄마가 느끼는 바도 같다. 사망한 학생의 자리에 있는 것이 내 딸이었을 수도 있다. 소설이 모녀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서로에 대한 걱정'이고, 그 바탕에 있는 '사랑'이다.


소설은 이에 멈추지 않는다. 실존의 위태로움에서 깨닫는 걱정과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감정조차 무참히 쥐어 뜯긴 이들이 있음을, '사고'라 불리던 '사건'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이들이 있음을 소설은 들여다본다. 내 주변 사람들을 향하는 사랑은,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래야 한다.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이분법을 넘어서


이제 수진과 수진의 어머니의 화해는 새로운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소설의 첫머리부터 알 수 있듯 수진의 어머니는 극도로 이타적인 인물이다. 반면 수진은 이를 거부하고 적당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려는 인물(수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상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극도의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이다.


우리의 상식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은 거리가 멀다.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타심을 위해서는 이기심을 없애야 하고, 이기심을 위해서는 이타심을 없애야 한다. 그렇기에 남을 돕는 것은 고행이 된다. 그것은 나를 배제하고 오로지 타인만을 위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카엘라」에서 수진(이기심)과 수진의 어머니(이타심)는 화해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수진과 수진의 어머니가 광화문 광장에서 깨닫는 것은 '내 가족을 향한 걱정과 사랑'이다. 다분히 이기적인 마음. 그러나 이 '이기적인 마음'이야말로 '타인'인 모녀가 세월호 유족들과 공감할 수 있는 발판, '이타심의 조건'이 된다. 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도 결국 나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과 함께 할 때에, 이기심은 이타심과 궤를 함께 할 수 있다.


이기적으로 굴자. 마치 내 가족이 참변을 당한 것처럼. 참사로부터 5년이 지났고 또 그다음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날의 사실 관계를 모두 알지 못한다(우리가 아는 ‘참사의 기억’…우리가 모르는 ‘기억의 참사’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04170600045).


우리는 조금 더 이기적으로 투쟁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이기심은, 유족들을 비웃고 폭식으로 '투쟁'하던 이들의  이기심과는 달라야 한다. 이기심이 이타심과 연결될 수 있음을 발견한 뒤, 남을 돕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우리 이제, '이기적'으로 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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