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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기적>이 '성장영화'가 아닌 이유

1


나는 여태까지 KTX에 타 보지 못했다. 군 제대 직후 딱 한 번 가 본 부산여행 때도 고속버스를 이용했고 앞으로도 지방에 갈 일은 좀처럼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 시간 반만에 서울-부산을 주파한다는 초고속열차는 내게 말 그대로 사회‘간접’자본일 뿐이다. 한 마디로 남의 일이라는 거다. 


그런데 만약 가까운 미래에, 부산이 고향인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와 나는 제법 잘 어울릴 테고, 그러다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종종 부산에 갈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명절 때는 대학 수강신청 만큼이나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던데, 실패라도 하면 피 같은 연휴가 고속도로 위에 흩뿌려질 것이다. (그 때까지 내 차 정도는 있겠지? 있을 거야.)


지금의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KTX지만, 미래의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둘 다 ‘나’인데도 둘은 서로 공감하지 못한다. 각자 어떤 입장인지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지역에 KTX가 개통된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무심코 느끼는 무관심, 또는 흥분까지 나눠 가질 수는 없다. 그 입장이 돼 보지 않고서는. 


2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기적>)은 신칸센의 규슈 개통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됐다. 그런데 감독을 맡은 이는 당대 최고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닌가. 홍보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지켰어야 했을 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자본과 예술이 겹치는 지점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이것만으로도 <기적>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전작에서 그래 왔듯 미묘하게 뒤틀린 가족을 등장시킨다. 무책임한 남편과 이혼하고 가고시마의 조부모 집에 돌아온 엄마.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형 코이치와 동생 류노스케. 삼대가 신칸센 개통에 대처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할아버지는 신칸센 개통을 계기로 한물간 가루칸떡(가고시마의 명물)이 다시 부흥할 수 있으리라 가슴  설레어한다. 반면 아빠와 엄마는 오직 자신의 감정에 몰두할 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은 신칸센에서 기적을 추출해 낸다. 두 대의 신칸센이 스쳐 지날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참으로 아이다운 발상이지만, 화산이 폭발해 가고시마가 없어지길 바라는, 그렇게라도 가족이 함께 살았으면 하는 코이치의 갈망이 귀엽지만은 않다. 

<기적>에서 신칸센은 가족 안의 동상이몽을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지만 실상 그들은 얼마나 다른가. 동시에 각 세대의 대표자이기도 한 인물들의 각기 다른 반응에 의해 신칸센의 존재는 서서히 형태를 갖춘다. 어디까지나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가는 동력은 달리는 신칸센이다. 이 정도면 상당한 광고 효과 아닐까.


3

가고시마 어디서나 거대한 활화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며칠 전(5월 29일)에도 흰 연기를 내뿜으며 위용을 내보였고, 전문가들은 향후 큰 폭발을 우려했다. <기적>의 배경이 되는 2011년도 예외가 아니어서 방금 널어둔 빨래를 털면 새까만 화산재가 잔뜩 떨어져 내릴 정도다. 코이치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위험한 환경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어른들을, 살기 좋은 오사카를 두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코이치가 마지막 장면에서 침을 바른 검지를 허공에 내밀고 “오늘은 쌓이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언젠가 본 할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어른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를 무작정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는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녕 어른스러운 일일까.


코이치의 변화는 각자가 너무나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다. 당연히 가족의 결합을 바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이 앞뜰에 심은 콩 때문에 가고시마에 갈 수 없다 말하고, 엄마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겁을 줘도 아빠는 가족보다 음악이나 ‘세계’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자신의 소망이 남과 충돌할 수 있다는 것, 오래 꿈꿔온 화산 폭발이 일어나면 모두의 꿈이 쓸려 내려갈 수 있다는 것, 그런 삶의 진실에 눈 뜨는 것은 분명 성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화산을 받아들인 코이치는 성장한 동시에 체념까지 해버렸다. 더군다나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부모의 불화 때문에 불가피한 불행에 내던져진 그의 이야기가 ‘체념영화’가 아닌 ‘성장영화’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4


아빠는 ‘세계’를 위해 음악을 계속하려고 한다. 아들이 혼자 저녁밥을 챙겨 먹고 빨래를 널도록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엄마는 그런 아빠를 견디지 못하겠다며 가고시마에 돌아와 코이치가 화산에 적응하도록, 성장과 체념이 반씩 섞인 어른이 되도록 만든다.

부모가 덜어낸 책임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대물림됐다. 부모의 ‘세계’가 지켜지기 위해 아이들은 안간힘을 써 ‘세계’의 의미를 오독하고 화산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받아들였다. 신칸센이 마주치는 순간에 (아버지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망을 포기한 코이치가 마주하는 건 다름 아닌 무덤가다. 


고레에다 감독은 사소한 일상의 장면에서 삶의 기적을 발견하는 아이들의 성장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 몫이어야 할 삶의 무게를 대신 떠안은 아이들의 비극을 심어 두었다. 현재의 일본을 이야기한 <기적>이 한국에 꼭  맞아떨어질 날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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