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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착하지 않아서 믿음이 가는 '선한' 영화

“넌 참 착해”가 순도 100%의 칭찬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지나친 순진무구함을 조롱할 때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착한 사람들이 자기 실속은 못 차리고 교활한 이들의 먹이가 되는 일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봐 왔다. 그런데 착한 사람은 모든 피해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희생자일 뿐인가?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착한 사람 한 명은 몇 인분의 사회적 피해를 대신 감당하며 살고 있는 셈이고, 덕분에 그 사람 주변의 몇 명 정도는 자신 몫의 피해를 덜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된다. 


다수가 뒤엉킨 관계에서는 이것이 대체로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중고등학생의 집단 따돌림 문제를 보자. 한 반에는 꼭 한두 명의 따돌림 대상이 있다. 절대 다수는 그를 함부로 대하면서 각자의 폭력성을 전시하고, 나머지는 이를 묵인함으로써 반 전체의 균형은 유지된다. 일일이 싸우는 대신 과시하는 이 과정에서 기묘하게도 상호간 인정과 연대의 감정이 솟아난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미 수도 없이 이러한 ‘연대’를 결성해왔다. 그리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방법만 교묘해질 뿐.


그렇다면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어떨까? 나보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과연 나는 홀가분해질까? 분명한 건 일대일의 관계에서도 착한 사람은 타인의 부정적인 반응을 최대한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덕분에 감정의 응어리를 마음껏 배설한 사람은 일시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고마워하기는커녕 나를 항시 받아주는 그에게 갈수록 무시무시한 악행과 폭언을 쏟아내게 될 공산이 크다. 분명 온갖 스트레스를 떠넘겼는 데도 나는 여전히 답답하기만 한 것이다.


문제는 ‘무조건적’ 수용에 있다. 이 말은 착한 사람이 무언가를 받아줄 때 일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낸 사람은 잠시 괜찮아질 수는 있지만 자신이 진실로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는 없다. 착한 사람은 그를 신뢰하고 존중해서 그런 나쁜 언행을 받아준 게 아니다. 관계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착한 사람의 줏대 없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영속성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타인의 부정적인 반응에 즉각적인 공격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관계를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착한 사람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다. 선한 사람이 상대를 수용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공격이나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선한 행동이 모두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는 겸손하고도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야만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선한 사람이 때로 단호해지는 것은 그에게 확실한 목적과 기준이 있다는 방증이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은 착하지는 않아서 더욱 믿음이 가는 선한 영화이다. 동화적인 설정에 걸맞게 모든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선하지만 결코 착하지는 않다. 부러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타인을 배려하느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돕는 이야기들과는 다르다. 그런 이야기는 숭고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현실감이 떨어지고,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개훔방>의 인물들은 파스텔 톤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생생히 살아 있고 그만큼 깊숙이  감정이입할 수 있다.


승합차에 살며 힘겹게 어린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강혜정)에게 딸인 지소(이레)는 집도 없이 창피하게 이게 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한다. 무능력한 엄마에게 이 정도 힐난은 당연하다는 듯, 사소한 질문에도 성의 있게 대답하는 법이 없다. 지소가 이토록 집에 목을 매는 이유는 생일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학교 분위기상 당연한 일이 됐기 때문이다. 생일이 다가오자 지소는 스스로의 힘으로 집을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남의 개를 훔쳤다가 사례금을 받고 돌려주겠다는 묘안(?)을 생각해낸다. 

범죄에 가까운 계획에 친구와 동생, 동네 피자 배달원까지 가담시키는 지소의 이야기는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 자칫하면 정말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 말고, 이 설정이 탁월한 진짜 이유는 어린이를 ‘천사’라는 오래된 우물에서 건져냈다는 것이다. 지소는 한낱 어린이가 아니라 자신이 갖고 싶은 걸 가지려고 애쓰는 한 사람의 행위 주체다. 하지만 동시에 순진한 어린이기도 한 지소가 집을 갖기 위해(남들처럼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역으로 지소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던져 준 사회의 취약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훔방>의 백미는 지소가 개를 훔쳤다는 사실을 노부인(김혜자)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개는 이미 돌아왔고 비밀을 영영 묻을 수도 상황이다. 그런데도 지소는 굳이 입을 떼기 시작한다. 집을 갖고 싶어서 당신이 무엇보다 아끼는 그 개를 훔쳤노라고. 누구도 쉽게 낼 수 없는 용기다. 털어놓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까 봐 그랬을까. 개를 잃고 마음고생을 한 노부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지소의 모습이 장하면서도 안쓰럽다. 


“힘든 시간들을 겪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도 하게 되는 법이지. 그렇다고 해도 네가 한 짓은 정말 나쁜 거야. 지소야. 그건 변하지 않아.” 그런데 노부인은 단호하다. 보통의 동화라면 따뜻하게 안아 주며 괜찮다고 했을 상황에서 <개훔방>은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이로써 지소는 자신의 잘못을 더욱 확실히 깨닫는다. 앞으로 지소는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부인의 확고한 기준, 즉 선함 덕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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