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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폭스캐처>

위엄(dignity)의 종말

실화를 빌린 영화


지난해 아쉬움을 가득 남기고 작고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대표작 <카포티(2006)>, 브래드 피트의 작품 중 최고의 연기라고 일컬어지는 <머니볼(2010)>에 이은, 실화 영화의 대가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2014)>는 1996년 미국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했다. 미국 최대의 화학 기업 듀폰 사의 상속자인 존 듀폰이 벌인 전대미문의 살인 사건이 그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억만장자의 38 구경 리볼버의 총구는 뜻밖에도, 자신이 직접 스카우트하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의 국민적 레슬링 영웅 데이브 슐츠(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리스트)를 향했다.


혹자는 그가 평소 코카인을 투약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변호인 측은 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며 참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2010년, 그는 모든 의문을 품은 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이 이해되지 못한 사건을 풀어내는 일은 지금까지 알려진 몇 가지 팩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졌다. 해석자를 자처한 베넷 밀러는 전작에서 그래 왔듯, 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영화는 재해석보다 재창조에 가까운데, 사실의 순서를 상당 부분 잘라 이어 붙이고, 심지어 바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존 듀폰(이하 ‘존’)이 데이브 슐츠(이하 ‘데이브’)에게 접촉한 시기를 바꾸었고,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96년 데이브를 죽이기 전까지 8년의 시간을 삭제했다. 


이 같은 과감한 사실의 왜곡은 그가 영화를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방증이다. <폭스캐처>는 엄밀히 말해, ‘실화 영화’가 아니라 ‘실화를 빌린 영화’다. 그러므로 <폭스캐처>를 찬찬히 뜯어보는 일은 실상 실제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직 베넷 밀러가 창조해낸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삼각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   


‘폭스캐처’는 존이 소유한 거대한 농장의 이름이자, 그가 후원하고 데이브가 이끌었던 레슬링 팀의 이름이다. 영화 <폭스캐처>에는 이 팀과 관련하여,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세 남자가 등장한다. 존(스티브 카렐)과 데이브(마크 러팔로우), 그리고 데이브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 이하 ‘마크’)가 그들이다. 데이브의 압도적인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크 또한 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선수권 3연패의 기록을 가진 유능한 레슬러다. 


<폭스캐처>는 세 남자 사이의 ‘삼각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이들의 삼각관계는 연애 감정에 기인한 통상의 삼각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갈등의 골만큼은 탁월한 로맨스 영화 못지않다. 다만 연애 감정의 자리를 ‘아버지’라는 관념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섣불리 말하자면, 존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한 남자’고, 마크는 ‘아버지가 필요했지만 실패한 남자’고, 데이브는 ‘아버지여서 살해된 남자’다.


존, 오이디푸스, 핵심적


이 영화를 보고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는 존의 남근에 과도한 집착을 드러내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최신형 장갑차와 기관총에 대한 수집벽이랄지, 장난감 기차 세트(train set)를 포기하지 않는 장면이 노골적인 버전이라면, 어머니의 취미인 승마에 대한 반발로 보이는 레슬링에 대한 막대한 지원은 다소 희석된 메타포다. 한 발 물러서서, 이것들도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하나의 취향이다. 그러나 ‘롤 모델’, ‘멘토’, ‘아버지’ 같은, 영화 내내 존이 수없이 사용하는 어휘는 그의 취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지침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은 너무나 컸고, 끝내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데이브를 ‘아버지여서 살해된 남자’로 만들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는 왜 아버지가 되지 못했는가. 당연한 말 같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 내내, ‘지켜보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87년, 데이브가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세계 선수권을 준비하고 있던 마크를 폭스캐처로 스카우트한 존은 마크가 훈련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카메라는 이 점을 부각하기 위해 마크를 지켜보는 존을 먼발치에서 찍었다. 일반적인 영화적 시선과 달리, 마치 익명의 누군가가 존을 보고 있는 듯한 사실적인 연출은 존의 마크에 대한 동경과 소유욕, 그리고 마치 그의 어머니가 농장을 노니는 말을 볼 때와 유사한 그의 표정을 쓸쓸하게 담아낸다.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한 마크와 파티로 향하는 헬기 안에서, 마크가 읽어야 할 연설문을 연습하게 하는 장면은 존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름 끼치도록 잘 표현한다. “조류학자이자, 저자이자, 탐험가이자, 자선가이자, 우취인(마크가 발음이 쉬운 ‘우표 수집가’로 바꾸면 안 되겠냐는 제안을 존은 단칼에 잘라낸다)”으로 소개하라고, 코카인을 흡입하며, 종용할 때의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럽다. 이러한 그의 집착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레슬러에게는 우러러보고 인생을 좌우해줄 롤 모델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요지의 다큐멘터리를 찍어 어두운 방에서 홀로 본다든가, “존은 나의 멘토입니다.”라는 대사를 데이브에게 억지로 말하게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존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는 오히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친구 하나 없이 오로지 ‘타이틀’에만 의존해 살아온 그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늘 코를 치켜들고 내려다보듯 말하며 소통을 거부하고 연설을 해대는 장면들은,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키워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렇게 공고해진 그의 거대한 결여를, 그 공허함을 덮기 위해 그가 아는 유일한 방식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이다. 종전의 섣부른 가정을 반복하면 그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아버지와 유사한 존재로 떠받들어주길 바랐다. 그가 가지지 못한 것, 그것을 가진 누군가를 삼켜버리면 마치 자신의 결여가 채워질 것처럼. 그러한 믿음으로 존은 마크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크는 ‘아버지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존과 마크의 연결 고리


영화의 초반, 초등학교에서 초청 강연의 연단에 섰을 때, 마크는 목에 건 메달을 당당하게 들어 보인다. 그때 엿볼 수 있는 그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운동선수가 이룰 수 최고의 성취를 이뤄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의 자연스러운 면모다. 그런데 연설을 마치고 내려와 그가 받은 돈은 고작 20달러다. 그나마도 원래 데이브가 올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는지, 이름이 마크라는 대답에 의아해하는 직원의 반응에 데이브는 형이고 형제가 모두 금메달리스트라고 구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좁은 차 안에서 햄버거를 허겁지겁 밀어 넣고, 좁은 방에 돌아와 인스턴트 라면에 핫 소스를 뿌려 씹어 삼킨다. 잠시 배는 채울 수 있어도 그의 정신적 허기는 달래지지 않는다. 더욱이 레슬러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이미 서 있는 그가 더  이상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에 비해 형 데이브는 실력에 사교성까지 겸비해 코치로 와달라는 곳곳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는 사람이다.


그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의 러브콜에 한달음에 달려갈 때, 마크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 서려있는 것은, 햇살이 비추는 아름답고 광활한 교외를 달릴 때 흐르는 우아한 음악은 그가 오랜만에 발견한 변화의 가능성에 얼마나 격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존의 격조 있어 보이는 태도가, 그보다 자신을 애국자라고 소개하며 미국 레슬링의 미래가 오직 마크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말이 그를 매료시키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과 마크에 대해 이미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들이 ‘조국’이라는 말에 그토록 감격하는 것은 그 거대하게 부풀려진 문제가 자신들의 채워지지 않는 결여를 덮어주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망 때문이 아니다. 일상적인 공허함에 허덕이는 이들이 흔히 빠지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고 나면 적어도 그것이 가짜임이 드러날 때까지는 초라한 자신의 문제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채닝 테이텀은 마크가 존을 대할 때 마치 충성심 높은 개가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연기했다. 존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르는 장면이 반복되어 갈수록 마크는 존에게 완전히 복종했고 존은 그런 마크를 어여삐 보았다. 그들의 관계는 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철저한 지배와 복종의 질서 아래 굳어졌다. 그러나 막상 마크가 자신에 손아귀에 들어오자 존은 마크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다. 마크를 완전히 가졌음에도, 그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떠받들도록 하는 그의 목적이 달성되었음에도 존의 결여는 전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자고 있는 마크를 불러내 파테르 연습의 도구처럼 쓴다든지, 어머니에게 무시를 당하자마자 마크를 불러내 따귀를 때리고는 “이 은혜도 모르는 원숭이 자식아!”라고 모욕을 퍼부을 때 존은 마치 반려동물을 학대하는 난폭한 주인 같다.


존과 마크의 관계를 가로지르는 이토록 명백한 상승과 하강의 곡선은 그들이 연결되었다가 멀어진 원인이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둘은 결여를 채우려는 방식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볼트에 너트가 끼워지듯 연결되었고,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멀어졌다. 대다수의 연애의 과정과도 닮아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렇듯 평면적이다. <폭스캐처>의 탁월함은 이 이차원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이브의 존재다.


위엄을 살해하는 사회에 대하여 


데이브는 ‘통합형 인간’의 전형이다. 훌륭한 레슬러이자, 현명하고 사려 깊은 지도자이자, 아내, 두 아이와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있는 아버지이며, 외로운 동생을 나무라는 법 없이 그만의 묵묵한 배려로 돌보는,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멘토를 자처하며 수시로 자신의 인간성을 침범하려 드는 존의 무례한 태도에 화 한번 내는 법 없이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인격을 지킨다. 무분별한 배려는 때로 정반대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배려는 쉽게 동정으로 얼굴을 바꾸거나 존의 경우처럼 지배욕의 실현 도구가 되기도 한다. 데이브의 배려는 늘 지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마크가 유아적인 투정을 부릴 때 스스로 판단력을 되찾기를 기다리는 침착하게 데이브의 표정에서는 위엄마저 느껴진다.   


위엄(dignity)은 ‘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또는 그런 태도나 기세’를 말한다. 존이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데이브는 <폭스캐처>에서 유일하게 위엄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마크에게 흥미를 잃은 존은 이제 데이브를 관찰하고,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식대로 데이브를 가지려 들고, 끝까지 실패한다. 그걸 지켜보는 마크의 상처는 갈수록 깊어가고 존을 완전히 무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관계는 끝났어도 고용관계는 여전하다.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필수 조건인 ‘생계’ 때문에, 마크의 자존감은 존에게 무참하게 착취당한다.


마크를 너무나 손쉽게 가졌던 존은 데이브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데이브는 한결같이 위엄 있는 태도로 존을 대하지만, 마크가 폭스캐처를 떠나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치자 존은 급기야 데이브가 자신에게 불만이 있다고 확신한다. 데이브의 ‘위엄’이 존에게는 곧 ‘불만’이 된 것이다. 지배와 착취를 통해 결여를 가리는 방법밖에 모르는 존은 데이브의 ‘위엄’ 앞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결여를 마주한다. 생애 처음으로 끔찍한 자신의 내면을 경험하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존은 무고한 데이브를 살해한다. 그가 죽인 것은 데이브였지만, 실상 자신의 내면을 벌거벗기는 ‘불만’이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인 ‘위엄’이었다.


<폭스캐처>라는 세계의 축소판에서 위엄은 살해되었다. 세 발의 총성이 울릴 때, 그것을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총을 가지고 있던 존의 운전기사마저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악마 혹은, 정신이상자가 벌인 엽기적인 살인극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존은 과연 악마인가. 긴 글 내내 언급하지 않은 핵심적 장면들이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주기적으로 치안은 강화된다. 존의 집을 수시로 드나드는 경찰의 숫자가 늘고, 번쩍이는 경찰차의 불빛이 이야기에 얼룩을 남긴다. 

데이브의 죽음 직전에 치안은 최대치에 이르러 폭스캐처의 정문에서 주민인 데이브 일행에게 신분증을 요구할 정도다. 이쯤 되면 그 많은 경찰의 목적이 치안이 아닌 ‘보안’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수많은 경찰의 틈에서 데이브는  어이없이 살해되고, 영화는 끝까지 이에 대해 아무런 보충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크가 동료들과 함께 경멸해마지 않았던, 이종 격투기 선수가 되어 러시아 출신 거구 선수가 기다리는 링으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마크의 약력은 관객들의 흥분을 돋우는 자극적인 조미료로 간단히 언급된다. 데이브라는 위엄의 상징이 살해되자, 그 위엄의 보호 아래 있던 마크의 위엄도 손쉽게 살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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