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양 Sep 29. 2015

<파수꾼>

우리는 손톱만큼 자랐다

이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 


힘이 센 기태(이제훈)는 반 아이들을 선동해 희준(박정민)에게 무자비한 모욕과 폭력을 일삼는다. 결국 희준은 전학을 가고, 기태를 말리려던 동윤(서준영)마저 기태의 친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어느 날 기태가 자살한다. 


마지막 문장만 제외하면 신문 사회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청소년의 집단 따돌림과 이로 인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 그런데 기태는 왜 자살했는가. 친구를 전학 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희준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이 사건에 의구심은 품은 기태의 아버지(조성하)는 기태의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가며 진실을 밝히려 한다. 그리고 영화는 희준의 시선으로 시작해, 이어 동윤과 기태의 시선으로 쉼 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간다. 영화의 말미, 결국 기태를 죽인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세 친구 


기태, 희준 그리고 동윤. 셋의 웃는 얼굴은 기태가 떠난 적막한 방 안, 바닷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속에만 남아있다. 우정을 과시하듯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른 아이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희준의 말처럼 ‘조용히’ 살고 있다. 


누구보다 친했고 서로 의지했던 이들의 우정은 ‘사소한’ 사건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들의 우정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부실했던 것인가. 이들을 똘똘 뭉치게 한 것, 그리고 서로를 증오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의 파수꾼이다 


파수꾼은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파수꾼은 지키는 대상을 위협하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해서라도 그것을 사수해야 한다.  그들 각자는 절대 잃을 수 없는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기태는 어머니가 없는 자신의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다. 희준은 기태보다 힘이 약하다는 열등감과,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기태를 원한다는 패배감이 뒤엉킨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다. 동윤은 친구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과, 여자 친구에 대한 나쁜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을 지키는 각자의 파수꾼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이러한 팽팽한 긴장 속에서, 기태의 사소한 오해는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촉발 장치에 불과했다. 비극의 원흉은 자신을 돌보느라 상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게 만든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자아는 본질적인 위협을 받았고,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상처를 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희준을 위해 예쁜 여자 아이의 고백을 거절한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자, 기태는 당황하고  억울해한다. 그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끔찍한 폭력을 희준에게 퍼붓는다. 기태의 입장에서 희준은 맞아도 싸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신의 탓도 아닌 어머니의 부재를 비웃는 희준에게 쏟아지는 폭력은, 적어도 기태에게는 정당하다. 


영화의 끝자락에 동윤을 찾아온 기태는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동윤이 대답한다. "잘못된 건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동윤은 친구들 중 가장 따뜻하고 사려 깊은 친구였다. 그러나 기태를 이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치졸함과 무력함을 드러나는 일이 되었을 때, 그는 파수꾼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기태를 악마로 규정한다. 


기태가 저지른 수많은 폭력과 욕설 때문이 아니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자신의 앙상한 내면을 드러낸 죄ㅡ그리고 기태의 연약함ㅡ에 대한 벌이다. 동윤은 자신을 향한 모든 분노까지 싸그리 기태에게 쏟아 붓는다. 기태만 악마가 되면, 뒤엉킨 실타래에서 한 부분만 싹둑 잘라내면, 문제는 해결된다. 아니 문제는 삭제된다. 


가장 나쁜 사람, 그리고 가장 불쌍한 사람 


물론 물질적인 폭력을 사용한 기태와 다른 인물을 동일한 위치에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기태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면 일방적인 ‘가해-피해의 구조’ 대신 마구 뒤엉켜 있는 ‘오인의 구조’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극악한 한 사람을 처단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도 언제든 기태가 될 수 있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있고 그걸 몰라준 사람이 있다. 열등감을 느낀 사람이 있고 그걸 알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파수꾼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른) 손톱만큼 자랐다 


나의 손톱은 짧고 둥글다. 정갈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별다른 불편 없이 음식을 집어 먹고, 글을 쓰고, 만나는 사람과 악수를 나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손톱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잘려나갈 것이다. 나는 편의를 위해 아무런 고민 없이 손톱을 자르고 다듬지만, 손톱이 불편할 만큼 자라고 그것을 잘라낸 수많은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기억을 아무런 고민 없이 잘라냈는지도. 나의 손톱은 여전히 짧고 둥글기 때문에, 정갈하기 때문에 나는 기태의 끔찍한 악행과 의문의 자살을 남의 일처럼 분석하고 비판하고 곱씹어 보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플래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