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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위플래쉬>

<위플래쉬>로 자기계발서 쓰기

내게도 멘토가 필요하다


몇 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탁월한 ‘멘토’ 역할을 선보인 가수 김윤아를 실시간 검색어에 올린 동영상이 있다. 일명 ‘김윤아 독설’이라는 4분 남짓한 클립인데, 사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본 탓도 있겠지만 영상 속 그녀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돼버렸다.


김윤아가 멘티 안아리에게 독설을 날릴 때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자신의 상처까지 내보이며 냉혹한 현실을 일깨우는 그녀의 태도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도 안아리는 끝까지 자신의 나태함을 인정하는 기색이 없다. 지상파 3사 중 하나인 MBC의 전파를 탔다는 건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그 무게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가수 지망생이 꿈꾸는 멘토의 코칭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창법을 고집하다니, 이쯤 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자기계발서가 점령한 지 오래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이라면 자기 이름으로 된 자기계발서 한 권 정도는 가져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세태를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나만 해도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괜한 거리감을 느낀 적이 있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 인간이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아리가 아닌 김윤아의 편이다.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자기의 색깔을 고수하느라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과감히 외면한 안아리를 응원해야 마땅하겠지만, 내 감정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또한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최고의 멘토의 채찍질을 고분고분 견뎌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 부와 명성을 두 손 가득 쥐고 싶기 때문이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은 지난 ‘김윤아 독설’이 뜬금없이 떠오른 것도, 그걸 보고 나의 모순적 태도를 들춰내 괜한 반성 모드에 돌입한 것도 다 <위플래쉬>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주인공 플렛처 교수와 제자 앤드류의 관계에 김윤아와 안아리가 묘하게 겹친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들이 뮤지션이고 사제지간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커플 사이의 간극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플렛처는 앤드류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플렛처(J.K. 시몬스)는 셰이퍼 음악학교 최고의 교수다. 그의 밴드원은 곧 최고의 학생이라는 등식은 오차 없이 성립한다. 최고의 밴드인 만큼 엄격한 규율로도 악명이 높은데, 늘 올블랙 패션(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을 고수하는 그가 몰고 다니는 어둠의 아우라는 주변 공기를 순식간에 냉각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문에 난 작은 유리창으로 플렛처가 지휘하는 밴드의 연습을 훔쳐볼 때, 그의 눈동자는 동경 그 자체다. 그 순간 앤드류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목격한다. 자신을 무시하는 동료들의 경멸 어린 뒷담화와 보조 연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에 이골이 난 그는 너무나도 먼, 최고들의 세계에 일순간 매혹된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를 돌아본 플렛처와 눈을 마주친 앤드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다.


이튿날 플렛처는 갑작스레 앤드류가 속한 밴드의 연습실에 찾아온다. 그의 급속 냉각 능력이 여지없이 발동하고 모든 연주자가 일제히 긴장한다. 그가 그곳에 올 이유는 하나, 새로운 밴드원을 발탁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예상되다시피 그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앤드류다. 그런데 왜 하필 앤드류인가? 플렛처가 오기 직전까지도 연습을 하나도 안했냐는 핀잔을 들었으므로 탁월한 실력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앤드류의 잠재된 천재성을 간파했기 때문일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엔딩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다그치듯 답을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에도 중요한 단서가 있다.  

‘더블타임스윙’. 말하자면 엄청나게 빠른 스윙 주법인데, 영화의 시작부터 앤드류는 주구창창 이것만 연습한다. 당장 내일 합주할 곡은 뒷전이고 오직 이 ‘고급’ 기술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앤드류가  선택받은 이유다. 앤드류가 원하는 것은 예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아무나 못하는 기술을 익혀 독보적인 드러머가 되는 것, 그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다. 방점은 ‘독보적’에 찍힌다. 영화 내내 연습을 위해 내쳐버린 여자 친구 외에, 앤드류의 친구는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위플래쉬>로 자기계발서를 쓰기 위해 지워야 할 것들


앤드류는 거대한 빌딩숲을 홀로 걷는다. 방에 돌아와서 그가 하는 일은 어김없이 더블타임스윙이다. 상처투성이 손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봉하고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모든 이의 힐난이 드럼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질주는 밤이고 낮이고 멈추지 않는다. 가까스로 따낸 메인 드러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하다 거대한 트럭에 치여 자동차가 산산조각이 나도, 말끔한 정장이 피로 흥건해진 뒤에도 그는 기어이 드럼 앞에 앉아 스틱을 휘두른다.   

영화의 마지막 10분, 넋을 놓고 바라본 앤드류의 신 들린 연주에서 나는 예술혼 같은 건 읽어낼 수 없었다. 100분 간 억압된 울분이 터져 나와 음악으로 승화될 때, 자신을 궁지에 몰고 음악 인생을 끝장내려고까지 한 플렛처와의 괴이한 교감의 순간에서, 내가 느낀 건 ‘악마적’ 전율이다. 그때 앤드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영화는 끝을 맺지만 앞으로의 그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음악적 성취가 아니다. 악마적 전율을 경험한 자의 삶이 어떻게 전복되는가이다.


앤드류는 분명 놀라운 음악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또한 많은 것을 잃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저자가 말하는 ‘성공’을 손에 쥐었지만, 그래서 머지않아 출판사로부터 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게 될 공산이 크지만 그의 책이 세상에 나오려면 지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만 했던 계단들을 모조리 치워버리면 그는 마음껏 공중부양을 시전하는 초능력자임을 선언하는 꼴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 모든 지난한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영화 <위플래쉬>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전히 안아리-김윤아 커플과 앤드류-플렛처 커플은 닮은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안아리가 앤드류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최고의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김윤아에게 투신했다면 <위플래쉬>의 좀 더 현실적인 버전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근거가 빈약한 음모론을 어쩐지 포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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