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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에너미>

나의 적(敵)은 누구인가

온갖 영수증으로 빵빵한 지갑을 든 친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영수증 버리는 것을 까먹을 만큼 게으른 사람? 혹은 영수증에 찍힌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때로 어떤 사람이 하는 말보다 그의 물건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때가 있다. 주인공 아담(제이크 질렌할)의 아파트가 그렇다. 꽤 고급 아파트임에도 그의 집은 휑하고 쓸쓸하다. 결코 불을 켜는 법이 없는 거실에는 작은 의자 하나뿐이고, 그 외에는 별다른 가구나 가전제품도 없다. 그의 삶은 이렇게 앙상하다.  


그런데 소위 그의 ‘조건’은 부러움을 살만한 것들이다. 그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퇴근 후에는 늘 매력적인 여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침대로 향한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을 갈수록 어두워져만 간다. 영화는 별다른 대사 없이, 건조한 섹스 장면과 강의하는 그의 모습을 파편적으로 삽입하고 뒤섞는다.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아담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닌 일개 부품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삶은 겉에서 보면 나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를 잠식하는 의미의 결핍은 더욱 절망적이다.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아담. 그런 그가 동료가 추천한 영화를 보다가 자신과 꼭 닮은 배우를 발견하고 격하게 흥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앤서니. 아담은 앤서니의 소속사 웹사이트를 통해 즉시 연락처를 알아낸 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며칠 뒤 한갓진 교외의 모텔에서 마주한 둘. 그들은 가슴의 흉터까지 똑같은 그야말로 도플갱어다. 

“단순히 나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와 충돌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세계관을 남김없이 털어놨다.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이것을 읽은 나는 다소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거미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하고, 그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순순히 대답한다. 그런 그의 순박함(?) 때문에 정교하게 조립한 영화의 구성은 힘을 잃고 상투적 이야기로 전락한다. 한 남자의 꿈이라는 선명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반대의 두 자아가 벌이는 싸움. ‘진정한 적(enemy)은 내 안에 있다!’는 아무래도 좀 식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화는 <파이트 클럽>의 오마주일 뿐인가. 


그러나 나는 <그을린 사랑>의 감독인 그가 그렇게 순박할 리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의미를 확장하고 싶었다. 그렇게 찾게 된 실마리는 역사 교수인 아담의 강의에 있다. 

“독재자들은 오락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돌린다. 또한 교육의 질을 낮추고 문화를 통제하거나, 개인의 표현을 일일이 검열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통제(control)했다. 그리고 이는 역사에 걸쳐 반복되는 패턴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되어 있다. 이로써 아담과 앤서니라는 두 자아의 싸움보다 높은 차원에서 군림하는 새로운 적(enemy)이 드러난다. 


아담과 앤서니의 긴장관계는 팽팽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포스터 속 거대 거미는 유유히 도시를 노닌다. 아담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우리 모두가 꿈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오롯이 나의 욕망이라 믿고 있는 것이 실은 통제(control)에 편리하도록 조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미는 우리의 내밀한 욕망과 사회적 통제가 뒤엉킨, 그래서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맹독을 품은 욕망을 상징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이번 세기가 지난 세기의 반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려한다. 헤겔은 말한다. 인류의 모든 거대한 사건은 두 번 일어난다. 칼 마르크스는 덧붙인다. 첫 번째는 비극이지만, 두 번째는 희극이다." 

이처럼 영화는 비관적인 전망으로 개인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히 한다. ‘내가 추구하는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닐 수 있다.’ 갈 길은 몰라도 딛고 설 바닥만은 제대로 마련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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