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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레볼루셔너리 로드>

나는 오해한다, 고로 존재한다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첫 만남은 젊은 날 어느 파티에서 이뤄진다. 수많은 이들이 요란스레 먹고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난 세상 모든 걸 느끼고 싶어. 진정으로 느끼는 것 말이야.” 프랭크의 호기로운 말 한 마디에 에이프릴은 그가 자신이 찾던 ‘그(the one)’임을 확신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할 ‘이유’를 발견한다.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연료를 그득 채운 그들의 배가 힘차게 출항한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다.     


섣부른 오해였을까.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느 부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그들을 동경하지만, 그건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감옥이 될 뿐이다. 정작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프랭크의 서른 살 생일, 그는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비서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 시각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선택했던 이유를 기억해낸다. 반짝이던 프랭크의 눈빛에서 희망을 발굴해낸다. ‘여기’에는 없는 생기와 충만함이 가득하다는 약속의 땅 파리, 그곳에서 새 삶을 일구리라 결심한다.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걸 찾아봐요.” 에이프릴의 파격적인 제안에 프랭크는 얼떨떨해 하지만 에이프릴의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그들은 웃음을 되찾는다. 달콤한 재즈 뮤직이 흐르고, 광고에서나 볼 법한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 연출된다. 잘 정돈된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아내에게 진한 키스를 건네는 남편의 모습. 그들은 이렇게 근사한 중산층이 표본이 되는 걸까? 이윽고 프랭크에게 뜻밖의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처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프랭크는 “자네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라는 사장의 말에 흔들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였다. 그런데 때마침 에이프릴이 임신 소식을 전하고, 프랭크는 그것이 빠져나갈 구멍임을 직감한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지 않고도 이 삶에 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프랭크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저열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모른 체한다.  


샘 맨데스 감독은 전작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에서도 ‘미국 중산층’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삶 이면에 드리운 그늘을 끈질기게 조명했다. 다만 이 정도로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공허할 뿐 아니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 주인공 부부에 대한 감독의 진단이다. 자신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인물 존(마이클 섀넌)의 입을 빌어서다. 존은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처지다. 이웃의 부탁으로 초청한 식사 자리에서 엉뚱한 말로 분위기를 망치는 존에게 프랭크는 ‘소통 불능’이라는 힐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갈수록 망가져가는 프랭크를 보고 있으면 누가 진짜 ‘미친 사람’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무언가 혁명적인 순간을 암시하듯 제목을 <레볼루셔너리 로드>라 붙인 건 지독한 역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인생의 뿌리 깊은 질문, ‘왜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에 답하기 때문이다. 한번쯤은 궁금하지 않았는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늘 제자리걸음인지.      


나는 오해한다고로 존재한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재탄생하는 경이로운 과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장난기 가득한 탐구를 시작한다. ‘과연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호기심을 품고 관계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내 깨닫게 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이 동어반복의 마술이 사랑이 품은 매혹의 핵심이다. 그러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토록 고결한 삶의 마지막 피난처가 고작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한다.


자유로에 자유가 없듯


합정역에서 2200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30분만 가면 파주출판도시에 닿는다. 뻥 뚫린 8차선의 자유로 덕분이다. 파주라는 머나먼 도시에 반시간 만에 갈 수 있다니, 교통수단의 경이로운 발달에 박수를! (짝짝짝) 자유로 덕에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 언제든 부담 없이 파주에 갈 수 있게 됐으니. 하지만 자유로 위에서 진정 ‘자유’를 떠올리는 이는 없다. 자유로와 자유 사이의 거리는 서울과 파주만큼이나 멀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와 혁명적인 삶과의 간극도 이처럼 까마득하다.

영화는 실패라곤 몰랐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두 주인공은 젊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백인 중산층 부부 프랭크(레오나오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다. 부부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115번가, 으리으리한 저택에 이사 와 주변의 부럼움을 한몸에 받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비참한 모습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이 영화는 고급스러운 그 집에 꼭 걸맞는 부부였던 그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를 낱낱이 해부한다.그 내밀한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좀 괴롭다. 하지만 진짜 끔찍한 것은 따로 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멋진 저택이다.

샘 맨데스 감독은 전작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에서도 ‘미국 중산층’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삶 이면에 드리운 그늘을 끈질기게 조명했다. 다만 이 정도로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공허할 뿐 아니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 주인공 부부에 대한 감독의 진단이다. 자신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인물 존(마이클 섀넌)의 입을 빌어서다. 존은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처지다. 이웃의 부탁으로 초청한 식사 자리에서 엉뚱한 말로 분위기를 망치는 존에게 프랭크는 ‘소통 불능’이라는 힐난을 퍼붓는다. 그런데 갈수록 망가져가는 프랭크를 보고 있으면 누가 진짜 ‘미친 사람’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무언가 혁명적인 순간을 암시하듯 제목을 <레볼루셔너리 로드>라 붙인 건 지독한 역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인생의 뿌리 깊은 질문, ‘왜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에 답하기 때문이다. 한번쯤은 궁금하지 않았는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늘 제자리걸음인지.     


나는 오해한다고로 존재한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재탄생하는 경이로운 과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장난기 가득한 탐구를 시작한다. ‘과연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호기심을 품고 관계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내 깨닫게 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이 동어반복의 마술이 사랑이 품은 매혹의 핵심이다. 그러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토록 고결한 삶의 마지막 피난처가 고작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한다.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첫 만남은 젊은 날 어느 파티에서 이뤄진다. 수많은 이들이 요란스레 먹고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난 세상 모든 걸 느끼고 싶어. 진정으로 느끼는 것 말이야.” 프랭크의 호기로운 말 한 마디에 에이프릴은 그가 자신이 찾던 ‘그(the one)’임을 확신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할 ‘이유’를 발견한다.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연료를 그득 채운 그들의 배가 힘차게 출항한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다.     


섣부른 오해였을까.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느 부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그들을 동경하지만, 그건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감옥이 될 뿐이다. 정작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프랭크의 서른 살 생일, 그는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비서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 시각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선택했던 이유를 기억해낸다. 반짝이던 프랭크의 눈빛에서 희망을 발굴해낸다. ‘여기’에는 없는 생기와 충만함이 가득하다는 약속의 땅 파리, 그곳에서 새 삶을 일구리라 결심한다.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걸 찾아봐요.” 에이프릴의 파격적인 제안에 프랭크는 얼떨떨해 하지만 에이프릴의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그들은 웃음을 되찾는다. 달콤한 재즈 뮤직이 흐르고, 광고에서나 볼 법한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 연출된다. 잘 정돈된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아내에게 진한 키스를 건네는 남편의 모습. 그들은 이렇게 근사한 중산층이 표본이 되는 걸까? 이윽고 프랭크에게 뜻밖의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처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프랭크는 “자네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라는 사장의 말에 흔들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였다. 그런데 때마침 에이프릴이 임신 소식을 전하고, 프랭크는 그것이 빠져나갈 구멍임을 직감한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지 않고도 이 삶에 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프랭크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저열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모른 체한다.  


에이프릴은 자신이 처음부터 오해했다는 것을 힘겹게 깨닫는다. 프랭크는 자신이 꿈꾸던 ‘그’가 아니라 그저 겁 많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녀가 정의한 삶의 이유에 그를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오해 위에 쌓아올린 사랑이 가뭇없이 스러져 내린다. 둘의 관계는 한없이 악화되고 에이프릴은 결국 제 손으로 낙태를 하다 목숨을 잃는다. 파국. 그렇다면 이 모든 비극은 권태에서 도피하려던 에이프릴의 경솔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일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그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됐다는 것. 삶이란 결국 지난 뒤 받아들여야 하는 오해의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 김소연 시인은 이렇게 썼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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