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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무뢰한>

그 놈은 왜 멋있어야만 했는가

'나쁜 남자’ 김남길


<무뢰한>을 보려는 사람은, 김남길의 허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포스터 속 껄렁한 자세에서 이미 ‘나쁜 남자’ 김남길과의 연장선이 선명히 드러난다. 김남길의 팬이 아니라면, <아저씨>에서 원빈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가라” 내지 “소미 어디 있어”를 읊조릴 때 ‘이 영화 혹시 코미디 아냐?’라고 의심해 본 사람이라면, <무뢰한>의 고독한 형사 재곤(김남길)이 불편할 수도 있다. 재곤은 누구보다 멋있고 그래서 우스꽝스럽다.  

한데 배우 김남길의 시작은 이렇지 않았다. 일일연속극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금순이의 남편으로 분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선하디 선한 청년의 심벌이었다. 느닷없이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나 고독한 칼잡이 비담으로 전국을 뒤흔들었을 때, 우리는 그의 선한 눈이 그토록 매서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진한 수염은 그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청년’에서 ‘남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무뢰한>에서 다시 멀끔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나쁜 남자’ 김남길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여기서 잠깐, 미남 배우 김남길을 이토록 못 살게 구는 건 그가 부러워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 단언컨대 재곤이 김남길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증명하는 데 이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두 얼굴의 남자


재곤은 특출난 형사다. 선배 문 형사(곽도원)는 잠복 중에도 재곤의 훌륭함을 칭찬하느라 바쁘다. 범인의 애인에게 돼지발정제까지 써서 실토하게 했다는 일화. 재곤은 탁월한 동시에 무자비하다. 그가 지금 쫓고 있는 건 살인자 준길(박성웅)과 그의 애인 혜경(전도연)이다. 일할 때를 빼고는 늘 차에서 쪽잠을 자는 그의 눈이 무전을 듣고 번뜩일 때마다 준길이 빠져나갈 구멍은 한 뼘씩 작아진다.


그런데 혜경을 만나고부터 재곤의 견고한 껍질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첩보를 듣고 혜경과 준길이 알몸으로 자고 있는 방을 완벽하게 급습한 재곤의 시선은 곤히 자는 혜경에게 머문다. 기어이 준길을 밖으로 끌어내더니 그 완벽한 기회를 놓쳐 버린다. 유유히 사라지는 준길을 바라보는 재곤의 얼굴은 아쉬움 보다는 ‘어쩔 수 없다’에 가깝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곤은 ‘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에 위장 취업한다. 가장 확실한 정보원인 혜경의 마음을 얻는 것이 수사에 필요한 일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는 그 일에 무척이나 몰두한다. 재미있는 건 그녀를 완벽하기 속이는 대신 성긴 거짓말을 부러 들키는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작전은 먹힌다. 어딘가 어수룩하면서도 진심 어린 배려에 혜경이 마음을 연다. 경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혜경은 서툰 재곤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단단한 재곤이 물렁한 재곤을 연기하면서, 점차 무언가를 내주고 받기 시작한다. 끈적하게 눌어붙은 경계 사이를 오고 가는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너무 쉽게 동의하진 말자. 그것은 뜨겁기보다 미지근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보다 쓰디쓴 소주를 닮아 있으니. 혜경이 재곤에게 문을 열어 준 것과 같은 연유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처절해서, 재곤은 혜경에게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의 본분


자기가 쫓는 범죄자의 애인에게 마음을 뺏긴 재곤은 원래의 본분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본 모습이 재곤이 아닌 영준이라면 정반대의 논리가 성립한다. 자신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 믿고 벌인 한 편의 연극 속에서, 재곤은 뜻밖에 자신의 맨 얼굴, 곧 결핍과 마주한다. 거짓말에 서툰 영준, 너무나 연약해 쎈 척을 해야만 살 수 있는 혜경과 닮은 영준. 그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깨닫는다.

혜경의 눈앞에서 준길을 쏴 죽이고, 완벽한 형사 재곤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 여운은 가시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재곤이 아님을 알아 버렸기 때문에. 영화의 말미에 재곤은 완전히 망가진 혜경에게 간다. 그리고는 애써 변호하는 대신, 혜경이 자신을 죽이도록 만든다. 그때 그의 표정은 처음 혜경에게 시선을 뺏겼을 때와 같다. ‘어쩔 수 없다.’ 예정된 죽음이 치러진다. 그렇게 재곤은 영준이 된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영준-재곤(이제는 그를 이렇게 불러야만 한다)은 끝내 그렇게 멋있어야만 했다. 나처럼 김남길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 김남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영문 모를 우수가 그의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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