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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ul 11. 2016

<우리들>

잊을 수 없는 얼굴, 잊지 말아야 할 얼굴

때로 가장 잔인한 것은 가장 부드럽다. 부드러운 표현은 잔인한 본질을 말하기 위한 가장이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포스터, 절제된 상황과 대사, 배우들의 말간 얼굴이 그렇다.


싱그러운 여름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94분간의 동화는 왕따라는 사회문제를 겪는 아이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안쓰러운 마음을 품게 하려는 르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들>은 열한 살 아이들의 마음에서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고개를 떨구게 하는 반성문이자,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와 방방 위에서 뛰놀고 싶은 어른들을 향한 아이들의 영화다. 


<우리들>을 이끄는 것은 주인공 선(최수인)의 얼굴이다. 어떤 대사보다도 힘이 센 선의 얼굴. <우리들>의 클로즈업은 감정의 고조 대신 반성의 시간을 권유한다. 기획에 참여하고 연출에 조언했다는 이창동의 영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두 감독 모두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다만 이창동은 구원을 말하고, 윤가은은 삶을 말한다. 이창동은 구원으로 삶을 얻는 방법을, 윤가은은 삶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창동의 <시>에서 손자가 집단성폭행의 가해자임을 알게 된 양미자(윤정희)는 피해 여학생이 자살했던 강물에 직접 몸을 던진다. 그렇게 양미자는 여학생을 위해 쓴 자신의 시와 하나 된다. 구원을 위해 삶을 포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창동의 용기다. 반면 <우리들>의 외톨이 선은 왕따라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또 다른 왕따 지아(설혜인)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어쨌든 살아야 하고 놀아야 하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원망을 멈추고 먼저 다가가는 것, 그것이 용기라고 윤가은은 말한다. 


끔찍이도 외로운 학교 생활에도 불구하고 선을 살아가게 하는 건 푸근하고 사려 깊은 엄마(장혜진)와 해맑은 동생 윤(강민준)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관객은 이 불편한 영화를 끝까지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의 귀여운 동생 류노스케(마에도 오시로)다. 진중한 형 코이치(마에다 코키)의 진지함을 납득하게 하는 것은 류노스케의 발랄함이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어려움 앞에서 형제는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그것이 이야기의 균형을 잡는다. 

다만 <기적>에서 류노스케의 발랄한 캐릭터는 영화의 주제의식에 완전히 스며든 반면, <우리들>에서 엄마와 윤이 보여주는 밝음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영화의 흐름에서 약간 도드라진 느낌이다. 물론 선의 외로움을 부각하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 어색한 감이 있다. 선이 겪는 고통에 엄마와 윤이 연관되는 장면이 추가됐으면 이야기의 집중도가 더 높아졌을 것 같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은 영화 초중반 인물들의 대화 장면에서 다소 전형적인 클리쉐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엄마에게 뭔가 말하려던 선이 망설이다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잠자리에 든 엄마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극의 흐름상 어색하진 않지만 좀 더 섬세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추억의 마니>의 한 장면이 좋은 예다. 외로운 주인공 안나는 요양을 위해 내려온 시골길을 홀로 걷고 있다. 한적한 그 길에서 안나는 콧노래를 부르다 멀리서 다가오는 자전거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잠시 멈추지만 그가 지나가자 흥얼대기 시작한다. 별생각 없이 스쳐 보낸 삶의 순간을 재현해 낼 때 영화는 생생한 리얼리티와 몰입감을 얻는다. 사소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들>의 각본도 어른의 기억 속 박제된 장면이 아니라 실제 아이들의 생활에 더 가까웠다면 어땠을까. 세밀한 포착에 대한 갈증이 느껴졌다. 

허나, 다소 지나친 기대이긴 하다. <우리들>이 직조해낸 아이들,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진실되고 아름답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웠던 선의 맑고 쓸쓸한 얼굴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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