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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ul 15. 2016

<데몰리션>

실패를 벗어나는 이야기의 세 가지 경우 1

<데몰리션>, <본 투 비 블루>, <백 엔의 사랑>. 우연히도 최근에 본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인생에 실패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렸다. 그래서 세 영화를 비교해보려 하는데 원형이라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양상이 약간씩 달라 함께 두고 보면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세 편을 연작으로 써볼 참이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순서는 역순이다. 



영화 <데몰리션> 

- 임시변통의 우울증 치료제


demolition(철거, 해체)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을 건축물에 비유하는 영화다. 잘못 쌓아올린 인생을 구제하려면 완전히 해체하고 주춧돌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 사람과 사랑을 집에 비유했던 <건축학개론>에서는 자신이 무심코 망가뜨렸던 대문을 보고 오열하거나(승민) 추억의 공간을 보존하면서 리모델링하거나(서연) 애써 외면해버린 첫사랑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승민이 버려진 집에 뒤늦게 찾아가 발견한 CDP) 반면, <데몰리션>은 그냥 신나게 때려 부순다. 스트리트파이터의 보너스 스테이지에서 폐차를 때려부술 때처럼 말이다. 경쾌한 락 음악에 맞춰 최고급 단독주택을 박살낼 때 배우도 관객도 쾌감을 느낀다.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에 아름다운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와 회사 사장인 장인(크리스 쿠퍼)까지 둔 한마디로 완벽한 조건의 남자다. 그런데 영화 시작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다. 사고 직전 아내의 마지막 말은 냉장고 좀 고치라고 했던 건데 데이비스는 흘려들으며 이죽대다가 사고가 난다. 아내가 죽었는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데이비스는 자기 삶이 처음부터 잘못됐다고 느끼고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분해하는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데이비스가 극복의 실마리를 잡는 건 한 소년 덕분이다. 고장 난 자판기 회사에 보낸 클레임 편지(말이 클레임 편지지 자기 꼬인 인생에 대해 줄줄이 적어 내려간 일기장 같다)에 감명받은 CS 담당자 캐런(나오미 왓츠)의 아들인 크리스(유다 르위스)가 그 소년이다. 캐런과 데이비스는 서로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만나게 되는데 덕분에 크리스와 데이비스도 친구가 된다. 크리스는 말끝마다 f워드를 내뱉지만 누구보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아이이기도 하다. 데이비스는 크리스와 공명하면서 자기 집과 삶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처음부터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착안과 접근만 떼놓고 봤을 때 좀 식상하고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지나치게 나르시시즘적인 데이비스의 세계는 자기만큼 상처를 받은 주변 사람들에겐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춘기 소년인 크리스와 동질감을 느끼는지도. 그럼에도 데이비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타인을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고, 무너지기 전 데이비스의 삶이 너무나 완벽하고 공고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데몰리션>의 윤리적 감각은 치기 어린 십대의 감수성에 바탕을 두지만 장 마크 발레(전작 <와일드>)의 훌륭한 솜씨로 공감할 수 있게 포장되었다. 내 감정을 다독이는 데는 좋은 치료약이 되지만 그게 좋은 인간으로 성숙시키는 효과까지 있는지는 모르겠다.



덧붙임)

크리스 역의 유다 르위스는 영화를 빛내는 보석이다. <데몰리션>의 세계관은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 때문에 주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는 크리스에게 비춰봤을 때 훨씬 울림이 크다. 그것을 표현한 유다 르위스는 퇴폐적인, 동시에 깨질 듯 연약한 십대 락커를 완벽히 표현해냈다. 영화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90년대 락의 이미지, 특히 요절한 커트 코베인이 떠오른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하는 크리스 쿠퍼나, 어느새 삶에 찌든 중년 여성에 어울리는 얼굴을 갖게 된 나오미 와츠의 연기도 여운이 길다. 제이크 질렌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이트 크롤러>의 광기 어린 인물이 그에게는 훨씬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제이크를 대체할 배우가 딱히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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