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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ul 27. 2016

<부산행>

각자도생의 슬픔

헬조선이라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한국만큼 힘든 나라는 수두룩한데, 한국’처럼’ 힘든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 외신을 보면 기시감조차 안 들 정도로 괴로운 상황에 처한 외국인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 좁은 한국 사람인 나는 서둘러 답답한 ‘우리’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나 1950년대 미국이 배경인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아니 사실 아쉬운 줄도 몰랐다. <부산행>을 보는 내내 흐르던 눈물이 마르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무척이나 위로받고 싶었다는 것을. 나와 같은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을. 


연상호와 눈물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을 두고 재능 있는 감독이 상업영화 시장에 입성하면 치러야 하는 불가피한 타협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과도한 신파로 개성을 잃었다고 독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부산행>이 톤 다운된 연상호표 영화, 그 이상이라 믿는다. 타협된 지점에서 태어난 변종이지만 그만의 확고한 매력을 가졌다고 믿는다. 본디 연상호 영화의 매력은 인간성을 끝까지 파헤치는 ‘하드코어’에 있었고, <부산행>에서도 그 태도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얼마나 악한가’가 아니라 ‘우리는 요즘 왜 슬픈가’로 방향키를 돌렸을 뿐이다.  


<부산행>에는 한국에서, 아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일 중독이 만든 한부모가정, 우악스러운 남자와 현명한 여자가 만든 신혼부부, 보수적인 버스회사에서 살아남은 상무이사, 발랄한 십대 야구부와 여자친구, 평생 일만 하느라 연약해진 할머니, 그리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들까지. 이들은 개인인 동시에 사회 구성원의 대표로 영화에서 제 역할을 한다. 폐쇄된 기차는 달리고 정부는 우릴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살아남으려 발버둥친다. <부산행>의 판타지적 요소는 딱 하나, 이들이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다. 근데 이건 정말 판타지일까. 어쨌든 눈물은 난다. 각자도생하느라 숨겨왔던 외로움이 터져나온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아픈 무릎 때문에 고생하던 할머니가 떠올라 처음 본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이는, 뒤에서는 좀비 떼가 몰려오고 앞에서는 감염을 의심하며 필사적으로 문을 막아서는 어른들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가 믿어왔던 세상이라는 안전망이 처참히 무너진 광경을 아이의 눈으로 보는 관객도 눈물을 떨군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오필승코리아를 부르짖으며 얼싸 안고 춤을 추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까지 쓰고나니 <부산행>은 확실히 신파다. 하지만 <부산행>은 ‘어떻게’ 대신 ‘왜’를 묻는 영화라는 걸 기억하자.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슬프게 살고 있을까, 혹여 지금이라도 바꿔볼 방법은 없을까를 자문하게 된다면, 지옥과 다를 바 없어진 기차 칸에서 스스로 지옥문을 열어젖히는 할머니의 결단에 공감한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다.



덧붙임) 


극장에 앉아 음료수 컵을 놓으려는데 컵꽂이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이 있었다. 옆자리 여자를 살짝 본 뒤 친구에게 “여기 내 자리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그냥 그 위에 얹으려는데 옆자리 여자가 허둥지둥 컵을 빼서 바닥에 놓았다. 의아해서 다시 살펴보니 맨 끝자리부터 컵꽂이 순서가 잘못됐는지 그녀 몫의 컵꽂이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그때 영화가 시작됐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부산행에 탑승한 사람의 심정이 돼 버렸다. 졸지에 이기적인 쪽이 돼 버린 나.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오래 불편했다.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만 그것 때문에 선량한 타인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오래된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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